[직설]혐오를 복용하는 사회

인아영 | 문학평론가 2020. 3. 18.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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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가 저 약들이랑 있으면 하루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는데… 저것들이 없으면 내가 아파서 잘 수가 없다고….”

최은미의 장편소설 <아홉 번째 파도>(문학동네, 2017)에서 보건소 약무주사보인 송인화는 방문 복약 상담을 위해 독거노인의 방을 찾아다닌다. 방에 홀로 있던 작고 마른 노인이 내놓은 약상자에는 유통기한이 지난 약과 부작용이 심해서 판매 금지된 치료제가 수두룩하다.

아픈 노인은 자신의 유일한 위안인 약을 빼앗길까봐 송인화에 대한 경계의 태세를 늦추지 않는다. 혈압약의 경우에는 꼭 하루에 한 번만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아시냐는 송인화의 말에 노인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거 몰라. 그냥 아플 때마다 먹어.”

<아홉 번째 파도>는 동해안의 ‘척주’라는 가상 도시를 배경으로 핵발전소 유치, 석회광산과 시멘트회사, ‘사이비’ 종교집단 약왕성도회 사이의 역학 관계, 그리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이 요즘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이유는 물론 코로나19와 신천지 때문이다. 마약성 진통제인 멕소닐을 20년 가까이 밀수하면서 몸이 아픈 지역 주민들을 유혹하는 약왕성도회는 고통받는 취약층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조직적인 착취를 일삼는 신천지를 떠올리게 한다. 유통기한도 부작용도 개의치 않고 아플 때면 아무 때나 약을 먹는다는 노인의 목소리는 손쉬운 구원에 의존하는 신천지 교인들의 상황과 겹치며 섬뜩하게 들린다.

그런데 고통을 없애주고 안락을 보장한다는 달콤한 약의 유혹은 ‘사이비’ 종교의 교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코로나19 사태는 인재(人災)다.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최초로 발생한 후에 각국의 방역체계를 뚫고 감염자가 확산되었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바이러스가 전염되는 과정에서 온갖 혐오와 차별의 기제가 작동, 양산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코로나19 사태가 유발하는 공포의 핵심은 호흡기로 곧장 침투하는 바이러스의 확산 속도가 통제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비가시적인 형태로 기생하는 생명체라는 점에서 정확한 메커니즘을 예측하거나 파악하기 어렵다는 사정도 중요하다.

문제는 ‘통제 불가능한 위험에 대한 공포’가 ‘통제 가능한 약자에 대한 폭력’으로 쉽사리 전환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코로나19 사태 이후 서구권에서 아시아인들이 극심한 인종차별을 당하고, 확진자의 감염경로와 사적 정보가 공개되면서 특정한 지역, 세대, 성향을 겨냥한 조롱이 집단적인 놀이로 전화되는 장면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실제 확진 여부와 무관하게 바이러스의 이미지는 더럽고 취약하고 ‘비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이들에 대한 혐오와 엉겨 붙는다.

약자에 대한 혐오는 재난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잠재우는 일시적인 효능감을 제공한다.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이 직접적인 힘을 가할 수 있는 약자에게 귀속시키면서 불안감을 해소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혐오를 복용하면서 고통을 마취하는 셈이다. 고통을 없애주겠다면서 극적인 효과를 약속하는 구원의 진통제와 다르지 않다.

약자 혐오를 통해 통제 불가능한 문제에 대한 일시적인 효능감을 충족할 때, 근본적인 해결책은 가려지고 상황은 악화된다. 약자에 대한 제재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환상은 손쉽게 권력과 유착되고 처방에 대한 의존을 심화하기도 한다.

<아홉 번째 파도>에서 약왕성도회가 밀수하여 신도들에게 나누어준 진통제는 결국 치명적인 부작용을 유발하며 약에 길들여진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을 길들이는 가장 강력한 진통제. 그것은 약이 아니라 독이다. 우리는 혐오를 “그냥 아플 때마다 먹”을 수는 없다.

인아영 |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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