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가 다급할수록.. '재난의 맨앞자리'에 불려나왔다

이문영 2020. 3. 23.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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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진 제로 동두천이든 최악의 대구이든
코로나19에 후순위로 밀려난 사람들
감염보다 생계 다급함이 더 무서워
대구에서 297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지난 8일 최순희 할머니가 서구 평리동 거리를 돌며 폐지를 줍고 있다. 대구/옥기원 기자

바이러스는 이 사회가 누구를 감춰왔고 무엇을 은폐해왔는지 정확하게 드러냈다. 이 세계의 후순위로 밀려나 있던 사람들이 바이러스가 진격하는 최전선으로 끌려 나와 가장 먼저 찔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평소 눈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재난의 맨 앞자리에 보이게 함으로써 눈에 보였다.

■ 바이러스는 가난한 순서대로 밖으로 불러냈다

사람들이 바이러스를 피해 집 안으로 숨을 때 최순희(가명·83) 할머니는 거리로 나왔다. 인적 끊긴 동네를 돌며 할머니는 폐지 상자를 주웠다. 대구에서 297명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온 날(지난 8일 대구 서구 평리동)이었다. 감염병이 대구를 휩쓸면서 평리동 거리에선 사람들이 증발했다. “지난 30년간 이렇게 쥐 죽은 듯한 적이 없었던 동네”(한 주민)에서 할머니의 손수레 끄는 소리가 쥐들도 숨죽인 골목을 울렸다.

“이거라도 안 하믄 밥은 우예 묵노.”

그에겐 감염의 두려움보다 생계의 다급함이 무서웠다. 신천지 교인 집단감염으로 741명의 확진자가 발생하며 대구의 공포가 최고조에 달했던 지난달 29일에도 할머니는 폐지를 주웠다. 그는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는 61살 아들과 산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 못했다. “기관지가 나빠 자주 일을 나가지 못하는” 아들은 “그마저 코로나 때문에 일이 끊겨 한달 가까이 집에 있었”다. 최근엔 이빨까지 빠지며 건강이 악화됐다.

아들의 수입이 끊기자 할머니는 생계가 막막했다. 차상위계층에 식재료와 음식 등을 지원하던 지역사회보장협의체도 감염 확산으로 활동을 멈췄다.

“코로나가 왔든 뭐가 왔든 내가 나와서 폐지라도 주워야 입에 풀칠을 한다카이.”

할머니가 온종일 폐지를 모으면 보통 4천원을 벌었다. 코로나19 탓에 택배 물량이 늘고 버려지는 상자가 많아지면서 1천원어치쯤 더 주울 수 있었다. 위험과 바꿔 얻은 ‘코로나 특수’를 끌고 할머니가 대구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 중 한곳인 평리동의 오르막길을 올라갔다.

코로나19 탓에 사람이 더욱 뜸해진 턱거리마을 거리. 동두천/이문영 기자

개학이 연기된 아이들이 바이러스를 피해 집에 있을 때 ‘그 아이들’은 집 밖으로 나왔다.

“대구에서 온 동생이 확진자였대.”

지난 10일 경기 동두천시 광암동 턱거리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휴대전화로 돌고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문자를 확인한 선생님이 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대구에서 동두천의 형 집을 다녀간 동생이 코로나19에 확진됐고 형도 보건소에서 감염 검사를 받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형 집이 ㄱ마트 근처라고 문자는 전했다. 방 안에서 마스크를 쓰고 음악을 듣는 아이들에게 다른 선생님이 설명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 동네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야. 그래도 너무 불안해하지 말고 개인위생 더 신경쓰자. 영진(가명·14)이도 마스크 써야지.”

“까먹고 집에 두고 왔어요.”

영진이의 장난스러운 말에 선생님이 마스크 하나를 가져다줬다. 남은 마스크가 몇개 없었다. 다행히 동생 영건(가명·12)이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영진이와 영건이는 편부 가정 아이들이었다. 베트남인 엄마와 이혼한 아빠는 주중에 트럭을 몰고 전국을 다니며 물류 배달을 했다. 형제 둘이 어른 없는 집에서 살았고 아빠가 사둔 컵밥과 라면을 주로 먹었다. 아빠는 토요일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챙긴 뒤 이튿날 다시 떠났다. 형제가 더 어렸을 땐 선생님들이 걱정될 때마다 집을 찾아가 청소와 빨래를 해주거나 돌아가며 아이들과 잤다.

문자 내용이 사실(이튿날 동두천시는 ‘가짜 뉴스로 확인됐다’며 유포자를 수사 의뢰)이라면 검사 결과에 따라 동두천시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ㄱ마트는 선생님들이 날마다 아이들의 식사와 간식 재료를 구입하는 곳이어서 걱정이 더했다.

부모가 집에 머물며 돌볼 형편이 못 되는 아이들이 지역아동센터(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 가정, 조부모·한부모 가정 아이들 대상)로 나와 긴급돌봄을 받았다. 센터에라도 나오지 않으면 코로나19의 두려움을 집에서 혼자 감당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었다. 동두천시 지역아동센터들에도 2월28일부터 휴원 조처가 내려졌지만 긴급돌봄이 필요한 아이들이 예외적으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밥을 먹었다. 이 아이들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보다 다급한 것은 혼자 두지 않는 보살핌이었다. 등록 아동 18명 중 센터 외엔 돌봄 받을 곳 없는 아이들이 12명이었다. 관내 아동센터 가운데 가장 많았다. ‘턱거리마을’인 까닭이었다. 동두천에서도 가장 가난한 마을이었다.

코로나19 확산 뒤 인적이 끊긴 대구 서구 평리동의 한 골목길. 대구/옥기원 기자

■ 바이러스는 전후방을 가리지 않았다

평리동이 위치한 서구는 대구의 구시가지다. 전체 가구의 절반(49%)이 월평균 소득 200만원 미만(100만원 미만은 26%)이다. 신시가지인 수성구나 달서구의 2배에 이른다. 평리동엔 서구에서도 노령인구와 낙후 주택이 가장 많다.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골목길 사이로 오래된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지난달 18일부터 평리동 거리에선 사람들이 사라졌다. 신천지 교인인 31번째 확진자가 서구(22일 기준 대구 확진자 6387명 가운데 서구 확진자는 493명) 주민이란 사실이 이날 공개됐다. 닷새 뒤엔 선별진료소인 서구보건소의 코로나 대책 총괄 공무원(감염예방의학팀장·신천지 교인)의 확진 소식이 전해졌다. 불안이 마을 전체를 감쌌고 일상은 정지됐다.

마을을 휘도는 고개를 넘을 때마다 숨이 턱에 찼다는 동두천 턱거리마을은 기지촌이었다. 1954년 캠프 호비 주둔 뒤 미군기지에 의존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며 숨이 턱에 차는 삶을 꾸렸다. 1970년대까지 동두천에서 가장 번화했던 턱거리마을은 주둔 미군이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쇠락했다. 생계수단이 사라지자 턱거리 사람들도 마을을 떠났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홀몸노인들과 동두천에서 가장 집값이 싼 동네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아 400여가구를 이뤘다. 감염 사태가 커지자 캠프 호비는 정문을 폐쇄해 병사들의 턱거리마을 출입 자체를 차단(보산동 캠프 케이시 쪽으로 일원화)했다.

감염병의 힘이 확진자 수로만 확인되는 것은 아니었다. 바이러스가 사람을 지운 풍경은 코로나19 사태의 최전방 대구와 22일 현재까지 아직 확진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은 후방의 동두천이 다르지 않았다. 대구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가 미감염지인 턱거리마을의 가난한 일상까지 원격으로 흔들고 있었다.

조기현 다울건설협동조합 대표와 조합원들이 지난 7일 대구 중구 반월당역 앞에서 노숙인들에게 도시락을 나눠주고 있다. 대구/옥기원 기자

■ 바이러스는 안전망 얇은 곳을 파고들었다 “건강관리 잘하셔야 돼요. 한 분만 (코로나) 걸려도 이(식사 나눔)조차 못 하니까.”

조기현 다울건설협동조합 대표가 도시락을 나눠주며 당부했다. 마스크도 못 쓴 노숙인들이 도시락과 음료수를 받아 들고 서둘러 구석으로 흩어졌다.

대구 반월당역에서 조 대표가 준비해 온 도시락 상자를 풀자 노숙인 40여명이 모여들었다. 그는 지난달 중순부터 노숙인들이 많은 대구역~동대구역~반월당역을 오가며 도시락을 제공하고 체온을 쟀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쉼터와 종교기관들이 무료급식소 운영을 중단한 뒤부터였다. 노숙인들에겐 “밥 한끼가 무엇보다 시급한 예방주사”였다. 밥 먹을 곳을 잃은 노숙인들이 소문을 듣고 대구 전역에서 시간 맞춰 찾아왔다.

“오늘 첫 식사예요.”

한 남성이 밥덩이를 입으로 밀어넣으며 말했다. 아직 힘이 남아 있어 가끔씩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한다는 그는 “지난 두달 동안 하루도 일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에게 ‘마스크를 쓰고 흐르는 물에 30초씩 손을 씻어야 한다’는 예방 수칙은 수행 불가능해 보였다. 대구 시내 5곳의 노숙인쉼터 운영이 중단된 뒤 노숙인들이 씻고 먹을 수 있는 최후의 공간도 사라졌다.

대구에서 노숙인들의 밥길을 끊은 코로나19가 턱거리마을에선 밥길을 만들고 있었다.

“할머니, 공부방이에요.”

오후 4시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이 준비한 도시락을 들고 아이들 집을 찾았다. 센터에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직접 도시락을 배달했다. 엄마가 일을 나간 뒤 할머니가 두 손녀를 돌보는 집에서 혜진·혜민(가명)이가 달려 나왔다. 그들 집 근처엔 연천군에서 확진된 군장병이 다녀간 탓에 방역팀이 출동한 국밥집이 있었다.

일거리 없는 턱거리마을의 가난한 부모들은 일을 찾아 마을 밖으로 나갔다. 바이러스의 공격을 피해 ‘일시 멈춤’ 할 수 있는 부모는 없었다. 일을 쉬어야 바이러스를 피할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쉴 수 없었고 바이러스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며 가난을 쏘았다. 선생님이 혜진이네 집을 나서며 전화했다.

“동호(가명)야, 출발하니까 내려와 있어.”

선생님을 보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동호가 자동인형처럼 귀를 갖다 댔다. 도시락을 건넨 선생님이 동호의 체온을 재고 온도를 기록했다. 동호 엄마는 콜센터에서 일하며 아들을 키웠다. 전날(9일)부터 서울 구로의 콜센터에서 집단감염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이윤을 짜내는 경영기법은 가난한 노동을 밀집시켰고 가난은 노동의 ‘거리두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 찬민(가명)이와 현지(가명) 남매 집엔 도시락을 배달하지 않았다. 남매는 엄마의 친정인 베트남에 가 있었다.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엄마는 귀국을 미뤘다. 일용직 건설노동자인 아빠는 현장 일이 끊겨 생활을 위협받고 있었다.

턱거리마을에서 시작해 마을 밖 신시가지(지행동·송내동)를 거쳐 돌아오는 도시락의 경로는 ‘가난이 몸을 숨긴 동선’이었다. 바이러스가 이 동선을 찾지 못하게 하려면 손을 씻는 것만큼이나 가난을 씻어내야 했다.

박용성 성공회 애은성당 신부가 지난 7일 대구 평리동의 차상위계층 노인들에게 긴급구호물품을 전달하고 있다. 대구/옥기원 기자

■ 바이러스는 허약한 시스템을 감염시켰다

“신부님요, 고맙소.”

박용성 신부(7일 대구 평리동 애은성당)가 골목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김정자(가명·86) 할머니는 인사를 멈추지 않았다. 집 앞엔 신부가 두고 간 쌀과 라면과 통조림이 있었다.

“내가 감염병 전파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신부는 생필품을 현관 앞에 두고 전화로 알린 뒤 대면 접촉을 피했다. 전화를 받은 할머니가 물건을 확인하는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신부가 말했다.

“급한 일 생기면 연락하세요.”

보름 만에 처음 외부 사람과 대화한 할머니가 음료수를 대접하려 했으나 신부는 극구 사양했다. 신부는 차상위계층 홀몸노인들의 이름과 주소·전화번호를 들고 그들의 집을 찾아다녔다. 대구의 모든 행정력이 추가 확진자 찾기와 병상 마련에 집중돼 취약계층을 살피는 데 구멍이 생기자 지역 종교인들이 긴급구제에 나섰다. 하루에도 수백명씩 감염자가 발생하는 대구에서 노인들은 마트에 가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2주째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김정자 할머니는 식료품이 떨어지자 성당에 ‘구조 요청’을 보냈다.

할머니는 코로나로 동사무소 공공일자리까지 끊겨 수입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는 마을 청소를 해서 받는 27만원과 기초연금 30만원으로 한달 생계를 꾸려왔다. 정부와 자치단체는 차상위계층에게 지원하던 자활근로와 식품 등을 코로나19 사태로 잠정 중단했다. 동사무소는 “감염 우려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못 되고 일을 못 하니 수당도 지급되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달엔 하루도 일을 못 했잖아. 이번달엔 꼭 해야 되는데.”

그 바람으로 할머니는 날마다 확진자 수가 불어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또 봤다.

‘눈 달린 바이러스’가 가난을 겨냥할수록 가난한 삶들은 더 깊은 가난 속으로 잠겨 들었다.

동두천 턱거리마을에서 홀로 지내는 한 할머니가 대문에 써 붙인 글귀. 평소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경로당에서 보냈으나 코로나19로 경로당이 폐쇄되면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동두천/이문영 기자

■ 바이러스는 ‘고립된 가난’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 반찬 왔어요.”

턱거리마을 안에 있는 동두천나눔의집(성공회 소속)이 조영숙(가명) 할머니의 방문을 두드렸다. 방문엔 할머니가 쓴 “나 노인정 가요”가 붙어 있었다. 평소 할머니는 대부분 경로당에 가 있었다. 이날은 경로당 가야 할 시간에 경로당에 가지 못한 할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마을의 홀몸노인들은 1960년대에 지어진 전형적인 기지촌 가옥(방 한칸에 연탄아궁이 겸 부엌 하나)에서 혼자 지냈다. 나눔의집은 일주일에 한번씩 그들을 찾아가 반찬을 나눴다. 감염병 재난은 그들을 집 안에 두고 자물쇠를 채우고 있었다. 국가의 돌봄 체계가 작동하지 않거나 해결 능력을 초과했을 때 가난한 자에겐 더욱 가혹한 피해가 닥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을 단위로 구축해온 공동체적 돌봄과 관계망이 국가적 재난 앞에서 그나마 사각지대를 줄이고 있었다. “코로나로 고립이 장기화되면 고립사 위험이 높아질 수도 있다”고 나눔의집 김현호 신부는 우려했다. 지난해 연탄가스를 마신 홀몸노인이 조영숙 할머니 옆방에서 사망한 지 며칠 만에 발견됐다.

턱거리마을의 경로당 세곳은 모두 폐쇄됐다. 경로당이 문을 닫자 대화 상대가 경로당 친구들밖에 없는 할머니들이 한 주민의 집을 택해 모여 있었다. 모임을 방지하기 위해 경로당을 폐쇄했으나 갈 곳 없는 그들은 경로당보다 좁은 방에 모여 마스크 없이 10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가난은 바이러스를 피해 도망갈 곳이 없었다.

경로당에서 제공하는 밥은 그들이 하루 한끼 먹는 밥의 전부였다.

“제대로 먹는 밥이 고작 그거였는데 경로당에도 못 나오니 우린 어떡해. 죽어지지도 않고….”

한 할머니가 웃는 듯 우는 듯 탄식했다.

“연탄이 떨어져서 걱정이야.”

최철국(가명) 할아버지가 길거리에서 버려진 상자를 줍고 있었다. 붕괴가 우려되는 슬레이트집에서 그는 혼자 산다. 수급자가 아니어서 폐지를 주워 생활한다. 공과금을 못 내 전기가 끊어지기도 했다. 수급자는 국가의 최소 지원 체계 안에라도 있었지만 수급자가 아닌데 수급자만큼 가난한 그는 재난에 훨씬 취약했다. 그가 반찬을 받아들고 들어간 좁은 방은 몸 둘 곳 없이 가난으로 꽉 차 있었다.

코로나19로 연탄 지원이 중단되자 그는 봄이 올 때까지 추위를 어떻게 견딜지 걱정했다. 그에게 연탄을 넣어주던 연탄은행엔 후원금이 끊겼고 배달을 돕던 군부대도 장병들을 내보내지 않았다. 그는 “연탄보릿고개”(오성환 동두천연탄은행 대표 “동두천에서 연탄 지원을 해온 15년 동안 최악의 시기”)의 꼭대기에서 찬바람을 맞고 있었다.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한 뒤 자가격리 중인 대구 중증장애인 김호형씨가 휠체어를 타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 대구/옥기원 기자

■ 바이러스는 ‘제도의 공백지대’를 찾아냈다

대구 중증장애인 김호형(가명)은 생사의 공포를 오갔다. 지난달 18일 장애인자립생활센터를 방문했을 때 확진자와 접촉한 뒤부터였다. 자가격리 통보를 받자 감염 위험으로 활동지원서비스가 중단됐다. 그는 8평짜리 원룸에 홀로 갇혔다.

그의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당장 먹고 씻는 것이 괴로움이 됐다. 격리 이틀 뒤 구청에서 생쌀과 라면을 택배로 보냈다. 그는 모욕받는 기분이 들었다. “(의도적으로 그러진 않았겠지만) 음식을 직접 해 먹을 수 없는 처지를 놀리는 것 같았”다.

감염의 공포로 김호형은 잠도 이루지 못했다. 몸이 약한 그에게 전염병은 치명적이다. 구청과 보건소에 빠른 검사를 요청했지만 대구 지역 신천지 교인 1만여명에 대한 전수 검사 탓에 계속 뒤로 밀렸다.

2015년 메르스 사태를 겪은 뒤 장애인단체들이 줄곧 주장한 ‘장애를 고려한 감염병 종합대책’은 코로나19 사태에 와서도 작동하지 않았다. 보건복지부가 자격증 없는 활동지원사에게도 수당을 지급한다는 긴급대책을 발표했지만 감염 위험을 무릅쓰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장애인단체 활동가가 직접 방호복을 입고 활동 지원에 나섰을 때에야 그의 고통에도 조금 숨통이 트였다.

17일 전국장애인부모연대는 성명을 내어 “현재까지 전국에서 확진된 발달장애인은 5명(가족은 7명), 자가격리된 발달장애인은 모두 18명(가족은 20명)이지만 정부 지원은 전혀 없어 오직 가족이 감당해야 한다”며 대책을 촉구했다.

턱거리마을은 의료공백 지대였다.

마을에 마스크 살 약국 하나가 없었다. 건강 이상을 문의할 보건소도 없었다. 마을이 쇠락하면서 세개 있던 약국은 차례로 철수했다. 마지막 약국이 마을을 떠난 지 15년이 지났다.

마스크 살 곳 없는 아이들과 홀몸노인들이 마스크 없이 지냈다. 마스크 5부제가 시행 중이었지만 아이들에겐 마스크 파는 시내까지 나가 줄 서서 마스크를 대리 구입할 부모가 없었고, 부모가 있어도 지방에 있었고, 같이 살아도 하루 노동이 다급해 마스크 살 시간이 없었다. 홀몸노인들은 마스크를 사러 갈 기력이 없는데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는 한시간에 두번밖에 다니지 않았다. 시청에서 지역아동센터에 마스크를 지급했으나 아이들이 사용하기엔 양이 부족했다. 센터 선생님들은 한 대형은행에 신청해 받은 지원금(15만원)으로 마스크와 손소독제를 구입했다.

아프리카 기니 출신 난민신청자인 하디야는 대구 지역에 코로나19가 확산된 지난달 중순부터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구/옥기원 기자

■ 바이러스는 이 세계의 서열을 확인시켰다 ‘등록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재난은 더욱 가혹했다. 미등록 이주노동자 등에겐 마스크 살 자격(주민등록번호나 외국인등록번호가 확인돼야 가능)도 주어지지 않았다. 바이러스가 자격을 따져 공격하진 않았지만 바이러스를 방어할 마스크는 자격이 있어야 주어졌다.

대구의 난민 신청자 하디야(31)는 세 아이에게 먹일 밥을 걱정했다. 그와 남편은 5년 전 아프리카 기니에서 왔다. 반정부 시위 참여 뒤 탄압을 피해 한국에 들어왔다. 부부는 3차례 난민 심사를 받았으나 인정을 거부당했다. 체류 기간은 남아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게 마스크를 구입할 자격이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코로나19 때문에 남편은 식당의 단기 아르바이트 자리도 구할 수 없었다.

“손님이 (외국인을) 싫어한다고 코로나 끝나고 오래요. 우리 애들 밥 먹여야 하는데.”

엄마의 걱정을 아는지 세 아이가 방 안을 뛰어다녔다. 국제아동단체의 지원을 받아 아이들을 집 앞 어린이집에 보내왔으나 코로나 확산으로 어린이집이 문을 닫았다. 다섯 식구가 한달째 집에 묶여 있었다. ‘마스크 없는 외국인’이 돼 밖에 돌아다니면 공격적인 시선들을 견뎌야 한다. 건강보험을 갖지 못한 그들은 치료비가 없어 아파서도 안 된다. 하디야는 오는 7월 넷째 출산을 앞두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숨겨지고 감춰지기 때문이었다. 바이러스는 가난이 숨긴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을 감춘 사회 앞에 끄집어냈다. 19가 종식되더라도 20이 되고 21로 이름을 바꾸며 코로나는 다시 올 수 있었다. 그때마다 바이러스는 이 사회가 빠뜨린 사람들의 주소로 정확하게 찾아갈 것이었다.

대구/옥기원 기자, 동두천/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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