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잠식한 '코로나 블루'

반기웅 기자 2020. 3. 2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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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pixabay

낯선 감염병은 공포를 퍼뜨린다. 코로나19 발병 초기에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격렬한 반응으로 표출됐다. 확진자와 ‘신천지’ 등 특정 대상에 분노가 쏟아졌고, 다른 한편에선 의료진에 대한 열렬한 지지와 응원이 이어졌다. 여론의 관심은 분노와 응원을 오가며 코로나19에 집중됐다.

감염병이 확산기를 지나 유행기에 접어들면 감정의 진동은 점차 가라앉는다. 분노와 응원의 강도도 약해진다. 그 자리에 우울과 불안, 무기력증이 들어선다. 감염병이라는 재난은 일상이 된다. 이른바 ‘재난의 상재화(常在化)’다. 미국 슬럼가 주민들이 폭력과 총격전 속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것과 같다.

재난이 일상으로 자리 잡는 사이 ‘코로나 블루’라고 불리는 ‘코로나 우울증’은 지역사회를 파고든다. 감염병 국면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건강한 흐름은 아니다. 코로나 블루는 장애인과 노인·저임금 노동자와 같은 취약 계층에게 빨리 스며들고 더 치명적이다.

“코로나 이후에 극단적인 생각을 자주 합니다.” 김인국씨(중증장애·가명·38세·대구 남구)의 일상이 무너졌다. 처음엔 낯선 질병에 대한 공포가 컸다. 대구·경북지역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퍼지자 불안감도 커졌다. 이후 치사율을 비롯한 코로나19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 감염에 대한 공포도 줄었다. 지난 2월 17일 김씨의 직장에 방문한 활동지원사가 며칠 뒤 코로나 확진자로 판명됐다. 2월 23일부터 김씨는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다행히 코로나19 검사에서 김씨는 음성 판정을 받았다.

격리 생활이 시작됐다. 시설에서 나온 김씨는 홀로 생활한다. 김씨가 밀접 접촉자가 된 순간 그간 이뤄지던 지원이 끊겼다. 밀접 접촉자의 집에 방문하겠다는 활동지원사도 없었다. 다른 지역에 사는 가족은 대구에 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미리 사둔 먹거리는 사흘 만에 바닥났다. 다행히 김씨가 다니던 직장에서 장애인 직원을 대상으로 지원 활동에 나섰다. 전신 방호복을 입은 직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왔다. 그들 덕에 자가격리 기간을 견뎌냈다.

“코로나19 이후 삶을 예측할 수 없다”

격리 해제 이후 외출은 가능해졌지만 김씨는 여전히 고립상태다. 직장은 사실상 휴업상태이고 수술 일정을 잡아둔 디스크는 병원 치료가 중단되면서 증세가 악화됐다. 불안과 우울이 찾아왔다. 어렵게 일궈놓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김씨를 괴롭혔다. 김씨는 “질병 자체에 대한 공포는 크지 않다”며 “이대로 내 생활을 잃게 될까 무섭다”고 말했다.

이형석씨(뇌병변 3급·가명·65세·대구 동구)는 활동지원사에게 매일 우울감을 호소한다. 진료가 중단되면서 신경과 약물치료가 중단됐다. 매주 3회씩 받던 물리치료도 끊겼다. 물리적 거리 두기로 2월 개학 예정이던 야학이 연기됐고 재활센터 활동도 하지 못한다. 활동가 이효림씨는 “무료함을 달래는 유일한 통로였던 야학 중단에 따른 우울감이 크다”며 “지금 상황을 계속 설명하고 있지만 심리적 불안감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전근배 대구 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은 “장애인이 느끼는 공포는 코로나19 이후의 삶을 예측할 수 없다는 데 있다”며 “현재 코로나 관련 장애인 지원 매뉴얼이 없기 때문에 언제든 고립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기저에 깔려 있다”고 말했다.

감염병이 만든 재난은 취약 계층의 사회적 안전망을 흔든다. 안전망이 흔들리면 심리적 지지대가 무너진다. 안전망의 끝에 있던 사람은 추락한다.

지난 3월 17일 오후 3시 45분쯤 제주의 한 공동묘지 앞 승용차에서 모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숨진 49세 ㄱ씨의 아들 ㄴ군(18세)은 중증 자폐성 장애인이다. 코로나19로 ㄴ군이 다니던 학교도 개학이 연기됐다. 긴급 돌봄 서비스는 시행됐지만 통학차량 운행은 중단됐다. ㄱ씨의 집은 학교와 20㎞ 거리다. 통학차량 없이 오가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코로나 확진자 이동 동선과 ㄴ군의 등하굣길이 겹쳤다. ㄱ씨는 ㄴ군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다. 돌봄은 오롯이 가정의 몫으로 돌아왔다. 이정희 자폐인사랑협회 제주부지부장은 “부실한 안전망 속에서 간신히 버텨왔는데 코로나라는 변수가 생기면서 끈을 놓아버렸다”라며 “예전처럼 개학해서 학교라도 갔다면 그 친구도 숨을 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Photo by Martin Sanchez on Unsplash

코로나19 고위험군인 노인들의 정서도 불안하다. 노인들은 감염되면 위험하다는 질병에 대한 공포와 함께 가족과 주변인에게 짐이 될 수 있다는 중압감에 시달린다. 경기도에 사는 김이숙씨(가명·75세)는 남편과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한다. 김씨의 남편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았고 김씨는 밀접 접촉자로 자가격리됐다. 확진자 동선이 알려졌고 김씨 부부의 신상이 지역사회에 퍼졌다. 김씨 부부는 자기들 때문에 사업을 하는 자식들이 경제적 손해를 입었다며 자책한다. 김씨의 심리상담을 담당했던 지역정신건강보건센터 관계자는 “스스로를 채근하면서 자책감에 시달리고 있다”며 “자식에게 짐이 됐다는 생각에 불안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손주와 함께 사는 이숙진씨(가명·62세)는 잘 때도 마스크를 2장씩 착용한다. 자신이 가족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밀접 접촉자로 자가격리됐던 이씨는 자가격리가 해제된 후에도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씨는 쉼 없이 손을 씻고 청소를 한다. 눈 뜨고 자기 전까지 코로나19 뉴스를 반복해서 시청한다. 이씨는 수면장애와 건강 염려증을 앓고 있다.

김씨와 이씨처럼 코로나19가 훑고 간 노인은 정부의 심리지원 대상으로 선정된다. 심리지원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 대부분의 고연령층은 불안 증세가 있더라도 자신을 고립시키는 방식을 택한다. 전준희 화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장은 “정보에서 소외되다보니 상담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심리적으로 불안한데도 가만히 있거나 조용히 사태를 넘겨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고 말했다.

“가족과 주변인에 피해” 중압감 시달려

고용상태가 불안정한 저임금 노동자는 감염병 취약 계층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연평균 소득 2만 달러 이상 3만 달러 미만의 웨이터와 계산원 등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저임금 서비스 직종 노동자들이 고임금 노동자에 비해 감염병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감염병으로 인한 실직 등 대량 해고 위험이 높은 집단이기도 하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임금 삭감과 무급휴직, 권고사직, 해고 등 코로나19 국면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비정규직에게 더 가혹하다. 노동자들에게 찾아온 우울은 경제적인 문제가 주된 원인이다. 과거 메르스 사태 당시 보건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에서 시행한 심리상담 사례를 보면 상담 대상자들은 주로 죄책감과 불면, 분노 그리고 경제적 문제를 핵심문제로 꼽았다. 김선희 정신과 전문의는 “코로나 이후에 발생한 생계 문제가 원인이 돼서 병원을 찾는 분들이 대부분”이라며 “여기서 추락하면 다시 올라올 수 없을 것이란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박선금 화성시 정신건강복지센터 팀장은 “코로나19와 관련해 10명의 심리상담을 하면 이중 3명은 경제적인 손실로 인한 분노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코로나 사태의 와중에 일부 사업주들은 노동자의 불안 심리를 부채질한다. 경기도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ㄷ씨는 지난 설 명절에 중국 동북지역 관광을 다녀왔다. 이후 회사는 ㄷ씨에게 자가격리 2주일을 지시했다. 이후 ㄷ씨는 자가격리 중에 전화로 계약해지를 통보받았다. 중국에 다녀왔다는 게 이유였다. ㄷ씨는 “이후 일을 구하지 못해 한 달 넘게 집에 있다”며 “스트레스가 치밀어 오르고 화를 주체하지 못하겠다”고 말했다.

‘코로나에 감염되면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며 직원을 압박하는 회사도 있다. 사측이 사내 메신저를 통해 공유한 지침에는 ‘직원 중 한 명이라도 확진되면 2주간 문을 닫아야 한다’며 ‘코로나로 문 닫는 일이 발생한다면 문책을 포함해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익명을 요구한 회사 관계자는 “코로나에 원해서 감염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며 “매일 손해배상 얘기를 듣는데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 활동을 하고 있는 윤지영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는 “근로자에 대한 징계는 마땅한 사유가 있어야 하고 손해배상은 불법 행위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며 “현재 사측의 지침은 이유를 불문한 강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손해배상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손해배상 청구하겠다는 회사도

취약 계층에게 먼저 안착한 우울과 불안, 분노는 점차 대상을 넓혀간다. 코로나 국면이 장기화될수록 우울의 농도도 짙어진다. 부실한 사회적 안전망에 매달린 장애인·노인·비정규직·영세자영업자 등은 속속 추락한다. 이 같은 소식을 반복해서 접하는 지역사회의 집단 불안 현상은 가속화된다. 불안은 혐오를 낳는다.

코로나19 발병 초기부터 사회구성원은 감염 위험이 높은 집단과 원인이 될 만한 대상을 찾아 차별하고 배척했다. 가장 먼저 낙인찍힌 대상은 ‘중국인’과 ‘서울 대림동’이었다. 이후 관심은 소수의 확진자에게 몰렸다. 신상과 동선을 포함해 일거수일투족이 공개된 확진자들은 여론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혐오와 배제의 대상은 대구와 신천지로 옮겨갔다. 신천지 교인들은 격리지침을 따르더라도 신천지라는 이유로 강제 해고를 당한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여론이 두려워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익명을 요구한 신천지 관계자는 “부당 해고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가 엄청난 여론의 질타를 받았다”며 “지금은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는 게 맞을 것 같다”고 말했다.

앞으로도 혐오는 대상으로 옮겨다니며 기승을 부릴 가능성이 높다. 감염병을 인류학 관점에서 연구해온 박한선 서울대 인류학과 박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건강한 사회에서 혐오와 낙인이 발생하면 대중들 사이에서 ‘그러면 안 된다’는 의식적인 반응이 나온다”며 “하지만 감염병으로 인한 집단 불안 현상이 장기화되면 자정 기능은 작동하지 않는다. 혐오가 고착화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도치 않게 찾아온 감염병이 낳은 우울증을 치유할 방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만 해답을 찾을 수 있는 방향은 제시된 바 있다. “감염병으로 인한 재난적 수준의 집단 공황상태를 방지하려면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이타성과 다양성 배려 등 긍정적인 사회·문화적 가치를 확립하는 사회적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감염 피해자나 격리자, 유가족, 의료인에 대한 사회적 보상체계를 구축하는 것도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공동체적 협력을 통해서 차별과 낙인을 넘어선 사회적 연대와 회복이 가능할 것이다.”(‘메르스와 전염병 인류학’, <생명윤리포럼> 2015 박한선)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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