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에 땜질 처방 급급.. n번방 '괴물' 키웠다

김진주 2020. 3. 30.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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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카메라ㆍ리벤지 포르노ㆍ딥페이크 등

사건 터질 때마다 ‘누더기 법안’ 양산

진화하는 범죄 예방 못하고 뒷북 처벌만

게티이미지뱅크

디지털 공간의 성범죄에 대한 안이한 대응이 성착취 동영상 공유방인 ‘n번방’사태를 불렀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정보기술(IT)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는 법의 공백 또한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IT기술을 활용한 성범죄는 나날이 교묘해지는 반면, 사법 시스템은 ‘땜질 처방’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특히 성범죄를 예방하고 처벌하는 법률 개정에서 누더기 입법인 경우가 많아 ‘n번방’ 류의 디지털 성범죄를 키웠다는 비판이 비등하다.

실정법이 현실을 선제적으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성범죄 관련 법률은 유독 범죄현실을 반영하는 속도가 늦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14조 ‘카메라등이용촬영죄’의 개정이 대표적이다. 온라인 공간을 이용한 불법 영상물이 ‘리벤지 포르노’를 거쳐 ‘n번방’ 사태까지 번지는 동안, 법률은 당장 불거진 문제를 메우고 지나가는 땜질에 그치고 말았다.

카메라등이용촬영죄가 제정된 것은 공중화장실 등에 설치된 ‘몰래카메라’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1998년 12월. 제정 당시에는 카메라 등을 이용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타인의 신체’를 ‘의사에 반해 촬영’한 경우만 처벌하도록 했다. 이후 사회적 파장이 큰 성범죄 사건이 발생하면서 세 번 개정됐다.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사이버 공간에서 음란물이 넘쳐나자 2006년 10월 첫 번째 개정이 이뤄졌다. 개정안에는 ‘촬영물을 반포ㆍ판매ㆍ임대 또는 공연히 전시ㆍ상영’ 문구를 추가됐고, 영리목적의 유포행위는 가중 처벌 규정이 포함됐다.

두 번째 개정의 계기는 신개념 성범죄인 ‘리벤지 포르노’의 등장. 헤어진 연인에게 복수할 목적으로 사귀는 기간 동안 촬영했던 은밀한 사진이나 영상물을 동의 없이 유포하는 행위가 횡행했지만, ‘동의된 촬영물’이란 이유로 가해자는 법망을 피해갔다. 비동의 촬영물의 유포만 처벌하는 법의 공백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커지자 입법ㆍ사법 당국은 2012년 12월 ‘촬영물을 반포ㆍ판매ㆍ임대’에 ‘제공’을 추가했다. 신고가 있어야만 처벌할 수 있었던 카메라등이용처벌죄가 비친고죄로 바뀐 것도 이 때다. 2018년에는 복제 콘텐츠 및 자신의 신체를 찍은 촬영물의 비동의 유포 또한 처벌대상에 포함됐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는 성범죄를 사후적으로 따라가며 처벌하는 패턴은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포르노 영상에 유명인이나 지인의 얼굴을 합성하는 ‘딥페이크’ 영상물이 문제가 되자 법무부는 딥페이크 영상물을 제작ㆍ반포하는 사람을 처벌하도록 하는 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이달 17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하지만 △성착취 영상을 직접 올리도록 강요ㆍ협박하거나 △성착취 피해자들의 신상을 유포하는 행위 등 ‘n번방’ 사건에 등장하는 핵심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은 이번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물론 범죄발생의 위험까지 예측해서 범죄구성요건을 포괄적으로 만드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없지 않다. 포괄적 규제는 당장 과잉입법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도 있다. 배상균 충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초빙교수는 “포괄적인 법안 마련의 필요성을 아주 부인하는 건 아니지만, 형벌은 인간의 자유와 신체를 제한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신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성범죄에 관해서는 가장 강력하게 처벌한다는 경계심을 세우지 않는 한 근절할 수 없다는 강경론이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회복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인격권 침해가 심각한데다 갈수록 그 방식 또한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는 만큼 개인의 자유권 보호보다 인격권 침해 방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장임다혜 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범죄는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채널 하나, 행위 하나를 막는 것으로는 더 발전된 범죄를 예방하기 어렵다”며 “성을 대상화하면서 착취하는 행위를 강력히 처벌하겠다는 의지를 개정법에 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복주 전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상임대표도 “표현의 자유도 혐오가 되는 순간 더 이상 보호받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자유 또한 타인의 인격권 침해 보다 앞설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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