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문화'는 끝나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지 않은가

김보라 | 감독 2020. 4. 1.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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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 기고

영화 <벌새>의 한 장면.

“너네 싸우지 좀 마.”

영화 <벌새>에서 주인공 은희가 오빠 대훈이 자신을 때렸다고 힘겹게 고백하자, 엄마가 던진 말이다. 아빠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고, 대훈 역시 또다시 넘어간 상황에 안심하고 밥을 먹는다. 언니 수희만이 이 상황을 이해하는 허망한 눈길로 은희를 바라본다.

내 주변의 여성들은 n번방 사건을 겪으며, 모두 몸의 통증을 호소한다. 한국에서 살며, 자신이 겪은 크고 작은 성폭력의 기억이 몸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절망 속에서 말을 한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그러자 말들이 튀어나온다. “이 사건으로 남녀 대결이 되면 안된다. 대책을 논의해야지 감정적으로 접근하면 안된다. 남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겠다.” 이 말들을 들으며 <벌새>의 바로 저 식사 장면이 떠올랐다.

여성을 향한 남성 폭력이라는 명백한 사건을 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하는 이 유령 같은 언어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 말의 발화자들은 갑질을 하는 상사로 인해 괴로워하는 회사원에게 상사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수 있는가. 타임머신을 타고 가 노예제 폐지를 위해 투쟁하는 흑인들을 향해, 백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수 있는가. 군대 내 폭력을 고발하는 사람들에게 선임들이 모두 그런 건 아니니, 선임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할 수 있는가.

여성들이 분노할 때 이 사회는 종종 ‘감정적이지 말라’는 말을 한다. 백인들 역시 흑인들에게 ‘성난 흑인 여자/남자’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하지만 여성들이 감정적인가. 우리는 ‘홧김에’ ‘안 만나줘서’라는 제목이 붙은 여성을 향한 남성 강력범죄 기사들을 너무나 자주 본다. 여성들은 지금 ‘홧김에’가 아니라, 자신의 생을 걸고 이야기한다. 여성들에게 이 사건은 우리가 마주하는 일상의 관계, 몸의 안전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을 두고 일반화하지 말라는 말은 이제껏 여성들이 살아내야 했던 현실을 부정한다. 공중화장실 곳곳에 불법촬영 방지 캠페인이 이뤄진다. 소수가 범죄를 저질러서는 일어나지 않을 대대적 캠페인이다.

한국의 거리에서는 너무나 쉽게 ‘아가씨 항시 대기’ 등의 간판들을 본다. 이 간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여성이 상품이라는 거듭되는 메시지다. 이 사회가 남성들이 룸살롱에서 고액의 불법 성구매를 하는 것을 ‘비즈니스’라고 호명할 때, 여성들은 스타벅스의 커피만 마셔도 ‘된장녀’가 됐다. 소라넷·버닝썬·웹하드·다크웹의 가해자들이 기이하게 ‘관대한’ 처벌을 받을 동안, ‘된장녀’라 호명됐던 여성들은 이제 ‘맘충’으로 불리게 됐다. n번방의 가해자들은 갑자기 한국 땅에 불시착한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남성 공동체가 즐기고, 방관하고, 외면한 ‘강간문화’와 ‘여성혐오’의 비극적인 결과다.

남자들은 또래 남자들의, 남자 선배들의, 아빠의 모습을 보고 남성성을 습득한다. 남자들은 주변 남성들이 여성을 대하는 방식을 보며, 자신의 남성성 놀이를 배워간다.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일반화하지 말라’고 하지만, 여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남자를 조심해야 한다’라고 배운다. 하지만 이제 여성 청소년들에게 남자를 조심하라는 교육 대신, 남성 청소년들에게 여성을 착취 도구가 아닌 인간으로 대하라는 교육이 필요하다. 우리는 더는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이 불안을 물려줘서는 안된다. 카메라가 무서워 공중화장실조차 갈 수 없는 그 처참한 불안을.

n번방 사건을 향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녀 갈등’이 아니다. 흑인들이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을 시작했을 때, 백인들은 ‘all lives matter(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로 고쳐 부르곤 했다. 남성들은 페미니즘을 휴머니즘으로 고쳐 부르려 한다. 권력자가 소수자의 목소리를 거듭해서 잘못 호명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직면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직면은 고통스럽고 그렇기에 큰 저항을 부른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성범죄자에 대한 강력한 처벌, 피해자 지원 그리고 남성 공동체의 자기 직면과 여성의 고통에 대한 경청이다. 이 ‘강간문화’는 끝나야 한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지 않은가.

김보라 |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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