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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당전쟁 현장중계4 – 당태종은 왜 안시성 공격을 지체하였나?

임기환 입력 2020. 04. 02.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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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93] 요동성 함락 이후 당태종과 당군의 행보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전회에서 살펴본 바이지만 당군의 행보 일정에만 초점을 맞추어 복기해보자.

당태종과 당의 대군이 요동성을 함락시킨 시점이 5월 17일이었다. 그리고 5월 28일에 백암성으로 진군하였다. 10여 일을 요동성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5월 28일에 백암성 공격을 시작하였는데, 백암성주 손대음의 항복으로 6월 1일에 백암성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6월 11일에 안시성으로 진군하였으니 다시 10여 일을 요동성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리고 안시성에 도착한 날이 6월 20일이었으니, 10여 일을 행군한 셈이다.

즉 요동성 함락 이후 안시성 공격을 개시할 때까지 한 달 이상을 지체한 것이다. 물론 이 기간에 백암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백암성은 성의 규모로 보다 이후 당군의 진군 방향으로 보아 요동성 함락 이후 시급하게 공격 대상에 포함시켜야 할 성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전회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 살짝 언급한 바 있지만, 의문점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다시 짚어보자.

요동성 함락 이후 10여 일을 머문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요동성 함락에 보름 가까운 기간 동안 맹렬한 공격을 펼쳤으니, 당의 군사들에게 힘을 보충하고 전력을 정비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요동성 공격 이전의 행보도 고려해야 한다. 당태종이 거느린 본대는 4월 10일 유주를 출발하여 요동성까지 장거리를 한 달여 동안 행군하였고 요동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공격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이세적이 거느린 선발대는 더욱 피로했을 것이다. 본대보다 한달 이상 먼저 출발한 데다 4월 1일 요하를 건너 이후 현도성, 신성을 공격하였고 이어서 4월 15일부터 시작된 개모성 공격에만 10여 일이 걸려 겨우 함락하였으며, 곧바로 요동성으로 이동하여 태종의 진군로를 확보하고 요동성 공격에 투입되었으니 그야말로 쉴 틈이 없었다. 그러기에 다음 공격을 위해 군사를 충분히 쉬게 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면 백암성 항복 이후 안시성을 공격할 때까지 다시 10여 일을 요동성에 머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백암성은 본격적인 공세가 들어가기 전에 바로 항복하였으니, 당군의 입장에서는 그리 전력의 손실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따라서 군사들을 쉬게 할 이유도 없었다. 그리고 비록 당태종이 직접 백암성 공격에 나서기는 했지만, 백암성의 규모로 보아 당군의 상당수는 요동성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일부 군대만 거느리고 진공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6월 초 시점에는 당군은 평상시 전력을 충분히 회복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중국측 기록을 보면 백암성을 차지한 직후 당태종과 이세적은 다음 공격 대상을 놓고 의논하는 장면을 전하고 있다. 당태종은 안시성이 험준하고 성주가 유능한 반면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식량도 적으므로 건안성을 먼저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이세적은 안시성이 북쪽에 있고 건안성이 남쪽에 있는데, 안시성을 지나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요동성에서 이어지는 군량 보급로가 끊기게 되면 어려움을 겪게 되니 안시성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당태종도 그 의견에 동의하였다.

즉 백암성 함락 직후인 6월 초에 이미 다음 공격 대상으로 안시성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군이 곧바로 움직이지 않고 6월 11일까지 10여 일을 요동성에 머물러 있었다. 필자는 지난 회에서 이 기간 당태종이 요동성에 머물렀던 이유를 짐작해 본 바 있다.

즉 당태종이 직접 나서서 백암성을 공격한 이유는 백암성이 먼저 항복을 요청하였고, 당 태종은 백암성의 항복을 이용하여 자신의 성군(聖君)으로서 이미지를 과시하기 위한 멋진 이벤트를 기획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실제 백암성에서 당태종이 고구려 주민과 군사들에게 베푼 아량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당 태종이 자신의 자애로운 군주로서 모습이 포악한 독재자 연개소문과 비교되어 고구려 후방의 여러 성들이 앞다투어 항복해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이런 이벤트를 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백암성 항복 이후 당 태종이 요동성에서 10여 일을 더 머물렀던 이유는 바로 자신의 백암성 이벤트의 효과를 기다렸던 것으로 생각한다.

백암성 성벽과 장대의 모습

하지만 그 어느 성도 항복하러 오지 않았고, 당태종은 예정대로 안시성을 공격하기 위해 6월 11일에 출발하여 6월 20일에 안시성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10일이 걸린 행군에도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안시성 공격에 실패한 후 퇴군할 때 당군이 안시성에서 요동성으로 돌아올 때에는 불과 2~3일밖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2~3일 걸리는 행군 거리를 10일이나 소요하면서 진군한 것이다.

물론 안시성을 공격하러 갈 때와 퇴군할 때의 상황은 많이 다를 것이다. 공격하러 갈 때에는 요동성 공격에 투입되었던 많은 공성무기들도 갖고 갔을 터이니 다소 시일이 더 걸릴 수는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10일이란 행군 기간은 어떤 특정한 사정이나 이유가 아니라면 납득하기 힘들다.

이와 같이 결과적으로 요동성 함락 이후 안시성 공격까지 한 달 이상을 지체하였으니, 이 기간 안시성의 고구려군으로서는 나름 만반의 방어태세를 갖출 수 있는 시간을 번 셈이었다. 당시 전황에서 속전속결 전술이 최선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당군의 행보는 너무 느긋했고 어쩌면 이점이 안시성 공격에 실패한 주요 요인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납득이 안 되는 점은 당군의 행보만이 아니다. 고구려 구원군의 행보 역시 쉽게 설명되지 않는다. 앞서의 전황을 복기해보자. 이적의 선발대가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요동성을 포위할 시점에 신성, 국내성에서 차출된 4만 고구려군이 요동성을 구원하러 나타났다. 그런데 당의 장군 이도종에게 군사 1000명이 사망하는 패배를 당하고는 그 흔적이 사라졌다. 요동성이 고립되어 보름 동안 격전을 벌일 때에도 전혀 그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요동성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면 4만 고구려군은 왜 요동성에 나타났다가 사라졌을까?

백암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만 고구려군이 오골성에서 구원하러 왔다가 당의 계필하력에게 격퇴되고서는 그만 사라졌다. 요동성 함락 이후 10여 일이 지난 시점이기에 고구려 구원군이 미리 백암성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백암성의 규모나 방어력으로 보아 1만 군사가 입성했다가 당의 대군의 공격에 몰살될 위험도 없지도 않기 때문에 애초에 입성을 전제로 한 구원군이 아닐 수도 있다. 백암성 구원보다는 오골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력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겨우 2000명 남짓한 군사에 불과한 백암성이 스스로 알아서 성을 지키라는 것은 성을 포기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어쨌든 당시 당측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요동성을 구원하는 4만 군사, 백암성을 구원하는 1만 군사의 행보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또 한 박자 늦게 구원군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우리가 당시 고구려군의 방어 전술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 설명할 수 없는 고구려 구원군이 등장한다. 바로 안시성을 구원하겠다고 나타난 고연수, 고혜진이 거느린 15만 대군이다. 당태종이 6월 20일에 안시성 밖에 주둔하였는데, 바로 그 다음날인 21일 고구려 구원군이 안시성 외곽에 나타났다. 이들은 당태종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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