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오죽했으면 판사를 바꿔 달라고 했을까..

양선희 2020. 4. 11. 00: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성범죄 엄벌만 외친 20년
여론에 조주빈 떡밥으로 던지고
n번방 주범은 징역 1년 솜방망이
사법부는 진정 엄벌의지가 있는가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왠지 이 또한 지나갈 것 같다. n번방 사건 말이다. 지금은 n번방의 악마성에 대한 경악과 비난이 들끓고, 각종 근절 대책 주문과 근절 다짐의 목소리가 드높다. 그러나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로 발칵 뒤집혔던 것이. 근절 대책 약속이 남발됐던 것이.

1990년대 말 인터넷이 도스에서 윈도로 넘어가던 즈음에 터진 여성 연예인 몰카 사건을 필두로 몰카를 이용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가볍게’ 일어났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불법 촬영물 실시간 공유 사이트 소라넷은 17년이나 평화롭게 운영되다 2016년에야 폐쇄됐고, 최근에는 대학생들이 여성 학우들을 성적으로 폄훼하는 단톡방 놀이에서 버닝썬, n번방까지 디지털 성범죄는 일상화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

디지털 성범죄는 터질 때마다 전에 없던 새로운 수법과 콘텐츠로 관전 포인트의 단계를 ‘격상’시킨다. 그 기이함과 엽기성의 한계는 매번 갱신된다. 이제는 미성년자 성 착취와 노예화까지 갔단다.

범죄자들은 날고,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해 실행에 옮기는데, 우리 사회의 반응과 대책은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언론은 주범 중 하나를 여론이 물어뜯을 떡밥으로 던져놓고, 사법부는 관련 피고인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한다. 여론의 표면에선 ‘가해자 응징’의 목소리를 키우고, 뒤편에선 ‘피해자 비난’이 극성을 부린다.

‘가해자를 엄벌하겠다고?’ ‘조주빈을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로 기소한다고?’ ‘이런 범죄를 근절하기 위한 법안을 만든다고?’

왜 이런 공언들이 내 귀에는 ‘X 풀 뜯어 먹는 소리’로 밖에 안 들리는 걸까. 지금 이 사건 모든 악의 근원은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인 듯하다. 포토라인에 섰던 그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고, 그를 비난함으로써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려는 듯 그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선데이칼럼 4/11
한데 그 이면에서 ‘n번방 창시자 갓갓’의 계승자 켈리는 이미 작년에 붙잡혀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그나마 본인이 형이 과하다며 항소해 지금 2심이 진행 중이지만, 검찰은 항소하지도 않았다. 검찰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역시 작년에 구속된 n번방 핵심 ‘와치맨’에게 검찰은 징역 3년 6월을 구형하고, 9일 선고 공판을 하려다가 최근 여론이 악화하자 다시 변론 재개를 신청했다. 조주빈에 앞서 활동했던 그들은 실명도 공개되지 않았다. ‘갓갓’은 아직 잡히지 않았다.

이런 행태, 너무 기시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여론이 물고 뜯을 만한 소위 ‘꺼리가 되는’ 범죄자 하나를 떡밥으로 투척해놓고, 대중들의 신경이 온통 거기에 쏠려 있는 틈을 타 우리 사회를 운영하는 높은 분들은, 평소의 관습과 그들의 질서를 완고하게 고수하는 행태 말이다.

그러고는 ‘극성스러운 엄벌주의자’들에겐 점잖은 말씀으로 적당히 제동을 건다. n번방 참가자 26만 명을 처벌하라는 주장에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호기심’을 운운한다. 자기 신분을 인증하고 돈까지 낸 적극 가담자들에게 말이다. 이 말에 달려들어 성토하는 반대 진영이나 반감 여론에 편승하려는 정치인들도 그야말로 진정성 없는 한바탕 ‘정치쇼’를 벌인다. 왜 ‘정치쇼’냐고? 이들을 어떻게 처단할지 대책을 내놓은 정치인이 있는지를 먼저 보라. 대책 없이 저희끼리 물고 뜯는 미끼로만 활용할 뿐이다.

절망적인 건 우리 사법 기관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다. 켈리처럼 이미 n번방 운영자들을 구속하고도 솜방망이 처벌에 아무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은 검찰. 성인지 감수성 제로의 부장판사가 관련 사건을 맡지 못 하게 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에 40여만 명이 서명하는 사태. 여기서 진짜 문제는 이미 성범죄 사건 판결에 수차례 의혹이 제기됐고, 일찍이 성인지 감수성을 의심받아 왔던 판사에게 애초에 사건을 배당한 법원의 ‘무개념’이다.

그러면서 이번 재판부 변경을 놓고 법원 안팎의 많은 관계자는 국민이 법원의 권위를 위협하는 건 옳지 않다는 뉘앙스로 점잖게 우려를 표명한다. 오죽했으면 40여만 명이 청원했겠는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이래서 법원 자체가 성인지 감수성, 어쩌면 범죄 감수성 제로지대인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받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 사법부의 판단은 얼마나 더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런 한편에선 사법부의 권위가 무너진 우리 사회의 무질서는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 두렵기도 하다.

얼마 전 BBC 뉴스 한국어판에서 “성범죄 사건에 항상 뒤따르는 ‘피해자 비난’ 양상이 피해자에 공감을 못 해서가 아니라 가해자에 대한 지나친 공감이 원인일 수 있다”는 기사를 봤다. 많은 남성은 “남성 가해자에게 나쁜 의도는 없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즈음에서 가담자를 ‘호기심’ 많은 철부지로 보는 정치인들, n번방 운영자 징역 1년 판결에 항소를 포기한 영감님들, 성인지 감수성 제로의 재판관을 선택한 법원 모두 ‘가해자 공감 능력’이 지나쳤던 건 아닌지 돌아보면 어떨까. 높은 분들의 통렬한 반성이 없다면 이번 사건도 여느 사건처럼 ‘찻잔 속 태풍’으로 지나갈 거다. 사법부는 ‘신뢰제로지대’로 브레이크도 없이 돌진하면서…다음엔 100만 명쯤 서명할 테지.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