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보다 무서운 '굶주림'..도시락 600개를 쌌다[남기자의 체헐리즘]

남형도 기자 2020. 4. 11. 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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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끼'마저 끊긴 노숙인·독거노인들..28년 밥먹인 '산타 신부님', 매일 도시락 600개 나눠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본 적이 있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보이지 않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코로나19로 '무료 급식소'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여기에 의지하던 노숙인, 독거노인 등은 하루에 한끼 먹기도 힘들어졌다. 안나의 집은 매일 도시락 600~700개를 만들어 나눠주기로 했다. 성남동 성당 앞마당에서, 첫 끼니를 먹으려, 봉지를 챙겨가는 사람들./사진=남형도 기자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곱슬머리 남자가 외치며 지나간 길은 묘하게 따뜻해졌다. 봄바람이 가볍게 부는 듯했다. 그가 사랑한다 말한 이들은, 행색이 대체로 남루했다. 떡이 진 백발에, 목발 한쪽에, 구겨진 비닐봉지에 고단함을 이고 있었다.

난 남자를 뒤따라가며 사랑한다고 외쳤다. 머리 위론 하트 모양을 그렸다. 쑥스러운 맘에 목구멍이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그걸 들은 이들도 내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몇몇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며 씩 웃었다. 아무렴 어떠하랴. 오후 4시의 햇살은 그리 따사로웠다.

사랑의 인사가 끝나고, 도시락 배분이 시작됐다. 길게 줄을 서 있던 이들은 노란 비닐봉지에 담긴 밥 한 끼를, 소중히 챙겼다. 맛있게 드시라고 인사하자, 그들도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소란을 피우는 이도, 누구 하나 더 달라 하는 이도 없었다. 그리고는 그걸 한쪽으로 가져가,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한 남자에게 다가가 물으니, "오늘 첫 끼"라고 했다. 그리고 남자는 반을 남겼다. 내일 아침에 마저 먹겠다고.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파란 눈의 산타, 김하종 신부님은 노숙인들을 향해 그리 외쳤다. 나도 그를 따라 "사랑합니다"라고 (소심하게) 외쳤다./사진=쑥스러운 남형도 기자


곱슬머리 남자, 푸른 눈을 가진 그는 신부였다. 이름은 김하종(64), 머나먼 이탈리아에서 왔다. 성은 김대건 신부를, 이름은 '하느님의 종'이란 의미로 지었단다.

사회복지법인 안나의 집(경기도 성남시 소재) 대표인 그는 코로나19로 밥 굶는,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도시락을 만들고 있었다. 그게 하루 600~700개 정도 됐다. 다른 무료 급식소가 거의 문을 닫아서, 사실상 안나의 집이 '마지막 급식소'나 다름없었다.

지난달 30일, 그곳에 도시락을 만들러 갔다. 김하종 신부와 함께. 그가 말하는, 매일 벌어지는 '기적'이란 어떤 것일까. 그 현장에 있어 보기로 했다.

28년간 노숙인 밥 준 '산타 신부님'
월급 60만원, 그는 노숙인들을 '가족'이라 부르며 28년 동안 무료로 밥을 먹였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사진=남형도 기자

회색빛 곱슬머리를 산발한 사람, 그게 김하종 신부의 첫인상이었다. 푸른 점퍼를 단출하게 입은 그는 소박한 미소로 날 맞았다. 방안을 둘러보니, 한편엔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반대쪽 벽엔 안나의 집 가족 이름이 쭉 적혀 있었다. 대표임에도 그의 이름은 맨 밑에 있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 그게 이유였다.

그가 궁금해졌다. 도시락을 만드는 건 오후 1시부터라, 아직 두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이야길 들어보기로 했다.

김 신부는 1990년에 이탈리아에서 왔다. 원래 이름은 보르도 빈첸시오. 한국의 매력에 빠져 동양 철학을 공부하다, 그대로 머물게 됐다. 무료 급식을 처음 시작한 건 1992년부터였다. 홀로 사는 어려운 노인들을 위한 거였다. 그렇게 6년이 지나고 1998년, IMF가 터졌다. 거리로 나앉은 이들이 급증했다. 김 신부는 성남으로 왔다. 그렇게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을 시작했다.

그게 벌써 28년이나 됐다. 안나의 집에서 밥 먹는 이도 550명 정도로 훌쩍 늘었다. 독거 노인이 30%, 노숙인이 70%다. 공휴일에도, 심지어 명절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 따뜻한 밥 한 끼를 그리 오랜 시간 베풀어왔다.

그에게 어떤 마음으로 한 거냐고 물었다. "사랑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안나의 집은 그에게 직장이 아니라, 가정이란다. 여기서 만나는 노숙인들은 형제고 자매란다. 그러니 출근하는 게 아니라, "가족을 만나러 온다"고 했다. 월급도 한 달에 60만원 받는다. 너무 적은 것 아니냐 했더니 "충분하다"며 웃었다. 가족이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거라며. 그의 별명이 '산타 신부'인 이유를, 만난 지 불과 10분 만에 알게 됐다.

코로나19로 시작한 '도시락', "매일이 기적"
코로나19로 안나의 집도 무료급식 대신 도시락으로 바꿨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러다 코로나19 사태가 터졌다. 수원, 영등포, 서울역 등 무료 급식소들 대부분이 문을 닫았다. 안나의 집은 그러지 못했다. 김 신부는 "우리 집 식구들, 하루 한 끼 여기서만 먹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마지막 보루랄까, 여기마저 무너지면 밥을 못 먹는단 얘기였다.

그래서 급식 대신 '도시락'을 만들기로 했다. 그게 2월 중순이었다. 도시락은 처음이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하루하루 해보잔 맘으로 버텼다. 다른 곳 무료 급식이 끊겨, 방황하던 이들까지 안나의 집으로 몰렸다. 도시락을 700개 만들고도 모자랐다.

오후 5시면 도시락이 동났다. 하루는 노숙인 한 명이 오후 6시30분에 왔다. "신부님, 밥 좀 주세요"라고 청했다. 김 신부는 "죄송합니다. 다 떨어졌어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빵에, 초코파이까지 다 나눠준 뒤였다. 그러자 그는 애걸하며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도와주세요"라고 했다. 김 신부는 그날 마음이 너무 아파 울었다.

그게 벌써 6주가 됐다. 김 신부는 "매일이 기적"이라 했다. 오후 1시부터 준비하는데, 그날 봉사자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다. 코로나19 감염 위험 때문에 오지 말라고 해서다. 그래도 매일 30~40명씩 모인다. 위험한 걸 알면서도 봉사하러 온다.

김 신부가 한 봉사자에게 "자매님, 위험하니까 오지 마세요"라 했더니 그가 이렇게 답했다. "신부님, 그건 잘 압니다. 근데 지금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더 많이 활동해야 해요."

그날도 봉사자 30명이 모였다
봉사를 시작하기 전, 기도하는 김하종 신부님. 나이, 성별, 종교, 사는 곳도 다 달랐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랴./사진=남형도 기자

정오가 됐다. 김 신부와 식사를 먼저 하기로 했다. 지하 1층 무료 급식소로 갔다. 콩나물무침, 닭 날개, 김치, 두부 된장국으로 점심을 먹었다. 김 신부의 접시는 가벼웠다. 밥도 적었고, 반찬도 조촐했다. 잔뜩 담으려다 순간 부끄러워져, 나도 그를 따라 적게 담았다. '확찐자(살찐자)'가 된 터라 겸사겸사. 그리고 굶주린 누군가의 밥을 줄이는 건 아닐까 해서.

오후 1시, 본격적으로 준비가 시작됐다. 다행히 봉사자가 30명 정도 모였다. 위생모자와 마스크를 다 썼다. 안나의 집 식구들, 성남동 성당 신자, 한양대 85학번 동기들, 오블라띠 수도회 신부님, 어르신 등 구성도 다양했다. 오늘의 기적을 일굴 시간이었다. 한데 모이자 김 신부가 기도했다. "예수님 당신을 믿고 있기에, 코로나바이러스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봉사합시다."

주방에선 밥과 반찬을 준비했다. 메뉴는 우엉조림과 닭볶음탕이었다. 생닭을 손질하는 봉사자들이 보였다. 그쪽은 내 영역은 아니라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음식이 마련될 동안 빵을 포장했다. 몸 쓰는 일이 잘 맞았다. 기부 받은 빵도 있고, 김 신부가 직접 동네 빵집을 돌며 팔고 남은 빵들을 챙겨오기도 한단다. 도시락이 혹시 모자라면, 밥 대신 주는 거라 했다. 노란 비닐봉지에, 빵 1~2개씩 담자, 김 신부가 "3~4개씩 충분히 담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그의 말대로 넉넉히 담았다. 다 포장하니 50봉지 정도 됐다. 수북이 쌓인 빵 봉지가, 개나리꽃 같았다.

'머슴 아리랑'을 틀어놓고
기자가 어묵 국물을 포장하고 있다./사진=뜨거운 남기자

어묵 국물이 먼저 마련됐다. 테이블 2개로 나뉘어 포장이 시작됐다. 국물을 뜨고, 받아서 넘기고, 뚜껑을 닫고, 단단히 봉해졌는지 확인해 통에 넣는 순이었다.

그중에서 난 뚜껑을 닫는 역할을 맡았다. 어묵 국물 통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정신이 없었다. 뜨거운 국물이라, 뚜껑을 닫아도 자꾸 가운데가 불룩하게 솟았다. 그대로 넘기니 "국물이 새요"라고 누군가 말했다. 옆에 있던 봉사자가 "가운데 부분을 눌러야 해요"라고 조언했다. 가운데를 누르면서 뚜껑을 신중히 꼭 닫았다. 땀이 줄줄 흘렀다. 계속하니 요령이 좀 생겼다.

말이 600개지, 생각보다 많았다. 포장하고 또 해도, 끝도 없이 밀려왔다. 허리가 뻐근해 왔다. 옆에 있던 봉사자는 의자에 앉았다. 앉으면 속도를 못 낼 것 같아, 그냥 서서 버텼다. 무리해서 뚜껑을 닫다가, 어묵 국물을 손에 흘렸다. "으악 뜨"까지 하다가,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누군가 틀어놓은 트로트 노래가 도움이 됐다. 제목을 보니 '밀양 머슴아리랑'이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날 좀 봐요. 봐요. 삐쭉빼쭉. 히쭉해쭉." 이런 가사였다. 흥이 났다. 후일담이지만, 나중에 집에 와서 운동할 때 한 번 더 들었다.

우엉조림을 밥에 올리는 봉사자들./사진=남형도 기자


10분 정도 쉬니, 이번엔 밥이 왔다. 밥 위에 우엉조림을 얹어서 포장하는 거였다. 여기선 밥을 받아서 고무줄로 묶는 일을 했다. 고무줄이 작아서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힘 조절에 실패해 끊어먹기도 했다. 고무줄을 묶는 사이, 밥이 2~3개씩 쌓여갔다. 빨리 적응해야 했다. 다 끝내고 쌓인 밥을 보니, 뿌듯했다.

성당 마당에, 노숙인들이 모인 이유
성당에 천막을 설치하는 봉사자들. 노숙인들은 이미 밥을 받으려 기다리고 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오후 2시가 넘었다. 이제 천막을 치러 갈 차례였다. 인근에 있는 성남동 성당으로 갔다. 앞마당이 꽤 넓어서, 여기서 나눠 준다고 했다.

이 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있었다. 김 신부는 "노숙인이 싫다고 민원이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더 싫다고 욕을 했단다. 그는 "저를 존경하는 사람도 많지만, 미워하고 욕하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위기의 순간에, 다행히 공간이 마련됐다. 성남동 성당 신부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 덕분에 깨끗하고 안전하게 도시락을 나눠줄 수 있게 됐다. 김 신부는 "너무너무 감사하고 좋다"며 활짝 웃었다.

성당 앞마당엔 이미 노숙인과 독거 노인들이 질서 있게 줄을 서 있었다. 도시락 배급은 오후 4시부터인데, 벌써 와 있었다. 그들의 모습과, 좀 전에 포장한 밥과 국물의 상(像)이 겹쳐졌다. 뻐근한 허리를 쭉 펴니, 하늘은 꽤 맑았고 바람은 시원하게 땀을 말려줬다.

천막을 다 설치하고, 테이블을 일렬로 놓았다. 이 위에 도시락을 일렬로 놓으면, 노숙인들이 하나씩 가져갈 터였다.

닭볶음탕의 습격, 쪼그라든 용기
메인 반찬인 닭볶음탕 등장. 솔직히 좀 먹고 싶었다./사진=배고픈 남형도 기자

대망의 닭볶음탕이 완성됐다. 이제 김치와 함께 포장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복병'이 하나 있었다. 새로 바꾼 일회용 용기였다. 검은색 플라스틱 용기에 뜨거운 닭볶음탕을 넣으니, 열기 때문에 맥없이 녹아버렸다. 신부님을 포함해, 다들 당황했다. 닭볶음탕을 식히자고 해서, 국자로 휘휘 저었다. 그리고 희망차게 다시 넣었지만, 역시 쥐며느리 주름 마냥 쭈글쭈글해졌다.

별수 없이 국그릇용 용기에 닭볶음탕을 넣었다. 어묵 국물을 포장하며 전문성이 쌓인 터라, 이번에도 뚜껑 닫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닭볶음탕은 국물이 자꾸 용기에 묻어서, 행주로 닦으면서 해야 했다. 멀티가 잘 안 되는 뇌 구조 탓에 쩔쩔매고 있으니, 앞쪽에 있던 어르신 자원봉사자가 날 도와줬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니, 날 보며 환히 웃어줬다. '괜찮아, 너의 불확실성 정도는 나의 전문성으로 커버할게'라는 듯이.

그리 합을 맞추다 보니, 손발이 척척 맞았다. 김치도, 닭볶음탕도 제자릴 찾아갔다. 사는 곳도, 왜 왔는지도 다 달랐지만, 묵묵히 하나가 됐다. 여기에 성남중앙로타리클럽서 기부한 마스크를 하나씩 넣었다. 같이 잘 이겨내자고, 아프지 말자고, 아마 그런 맘이었다.

도시락 개나리꽃이 피었다. 그리 보였다./사진=남형도 기자


그리 모든 포장이 다 끝났다. 한쪽 구석에 가지런히 놓인 도시락 상자들이 어쩐지 곱고 아름다웠다. 보통 치느님(치킨)에 많이 쓰는 표현인데, 그날 본 도시락들은 정말 그랬다. 참 많은 마음이 담겼다. 그래서인지 보기만 해도 어쩐지 배가 불러왔다.

노숙인의 한숨…"코로나가 '보릿고개' 같아요"
내가 만든 도시락 한끼가, 누군가에게 행복이 된다는 것. 그게 그날 하루의 보람이었다./사진=남형도 기자

도시락 600개가 담긴 상자는 봉사자들 손에서 손으로, 지하에서 1층으로, 봉고차에서 성당으로 옮겨졌다. 오후 4시부터 배고픈 이들의 손에 쥐어질 참이었다.

넓은 성당은 도시락을 받으려는 이들로 가득했다. 담벼락을 따라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갈 무렵, 잔디밭에 앉아 식사하는 이들에게 갔다. 모두 네 명이었다. 아까 포장한 닭볶음탕도, 어묵 국물도, 밥도 맛있게 먹고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그 밥 한 끼의 의미가, 그들에게 어떤 것인지 물었다.

83세라고 밝힌 한 할머니는 "세상에 신부님 같은 분이 없다. 진짜 사랑한다. 너무 잘해주시니까 목이 메인다"고 했다. 아들이 아파서 평소 끼니를 대충 때우다가, 우연히 알게 돼 안나의 집에 왔다고 했다. 그는 사랑한다는 이야길 많이 했다. 어르신들은 낯간지러워서, 보통 잘 안 하는 얘기였다.

79세라는 한 할아버지는, 7년간 일을 못 했다고 했다. 한 달에 30만원으로 버틴다고 했다. 생계는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었더니 "죽지 못해 사는 거지요"란 대답이 돌아왔다. 다른 무료 급식소는 밥이 다 끊겼다고 했다. 그러니까 여기가 그만큼 중요하단 얘기였다. 안나의 집에선 소화제도, 진통제도 준다고 했다. 옷도 준단다. 그는 "정말이에요. 나 거짓말 하나도 없어요"라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마음이 느껴졌다.

왼쪽에 앉은 노숙인은 지하철역에서 왔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가 보릿고개(식량이 다 떨어져 굶을 수밖에 없던 4~5월의 춘궁기) 같다"고 했다. 이어 옛날 얘길 했다. 그땐 밥을 쫄쫄 굶는 일이 정말 많았단다. 배고픈 사람들이 죽어 나갔단다. 그러면서 "하루만 굶어도 힘이 없어서 정신이 핑핑 돈다"고 했다. "배고픈 걸 달래주잖아요. 참 고맙지요." 그에게 도시락은 그런 의미였다.

내일 또 오시느냐는 물음에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네"라고 답했다. 부디 건강하셔야 한다고, 덕담을 건네며 뒤를 돌았다.

신부님의 지난밤 꿈 이야기
"맛있게 드세요" 인사하는 기자. 얼굴이 어색하게 나와서 블러 처리했다./사진=김하종 신부님

오후 5시30분이 될 무렵, 도시락이 모두 동이 났다. 마지막에 온 이는 "아직 도시락이 있나요?"라고 묻더니, 그렇다고 하자 환히 웃으며 받아 돌아갔다. 정리가 끝나고, 봉사자들도 하나, 둘씩 떠났다. 고생했다는 인사와 함께.

20년을 봉사했단 이에게 물었다. 코로나19 때문에 혹시 오기 무섭진 않았냐고. 그랬더니 그는 "난 걱정이 없는데, 주위에서 걱정했다"며 "기저질환도 있지만 이 나이에 없는 사람이 어딨느냐. 그냥 봉사한다"고 답했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곳에 올 수 있단 게 참 좋다면서.

봉사하고 돌아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사진=남형도 기자


김 신부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두려울 때가 없느냐고.

그러자 그는 꿈 이야기를 했다. "어제 이런 꿈을 꿨어요. 아주아주 피곤했어요. 쉬고 싶어 어느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침대가 많이 있었어요. 거기 누우려 했더니 안 된다고, 다 쫓아내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문 옆에 있는, 작은 침대에 겨우 누웠어요." 그가 느끼는, 지금 상황과 고스란히 닮은 꿈이었다.

한 번은 직원이 열이 39도까지 올랐단다. 그날 김 신부는 잠을 한숨도 못 잤다. 다행히 음성이었다. 봉사자들을 보면서도 마음 속 갈등이 굉장히 많다. 기쁘게 봉사하러 왔다가 혹시 죽을까 봐서.

재정적인 어려움도 크다. 주로 성당을 다니며 후원을 받는데, 코로나19로 미사가 중단돼 후원금이 급격히 줄었다. 도시락을 줄 사람은 늘었는데, 지원은 많이 줄었다. 매일 고비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힘들다고 했다.

노숙인 무료 급식뿐 아니라 자활사업, 청소년 단기, 중장기 쉼터, 청소년 자립관 등 관여하는 프로그램도 많다. 단순히 밥만 주는 게 아니라, 한 사람으로 잘 살 수 있게 해주려는 그의 맘이 담겼다. 수많은 노숙인들이 그로 인해 재기했다. 직장을 다시 다니게 된 한 노숙인은, 김 신부를 찾아와 10만원을 건넸다. 2년 동안 도움을 잘 받았다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고, 고맙다고.

김 신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많이 피곤하고 쉬고 싶어요. 그렇지만 쉬지 못해요. 아프면 안 돼요. 제가 아프면 바로 중단됩니다. 그러면 700명이 식사를 못해요. 어디서 식사를 하겠어요. 정말 어려운 사람들이에요. 얼굴만 봐도 이해할 수 있어요. 마음이 무겁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직 앙상한 나뭇가지에 태양이 뜨겁게 걸친 걸 보고 신부님과 닮았단 생각을 했다. 다 내어주고도 가장 밝게 빛나는 사람./사진=남형도 기자

에필로그(epilogue).실은 도시락을 챙겨가는 이들을 보며 마음이 어지럽기도 했었다. 취재하다 한 노인이 "형편이 괜찮으면서, 공짜라고 받아가는 사람 있겠지"라고 말한 뒤였다.

그 뒤론 그들의 모습을 보고, 행색을 따지기 시작했다. 운동화가 비싸 보인다고, 얼굴이 깨끗한 것 같다고. 한 번 바람에 들썩여 치솟은 먼지처럼, 그 복잡한 기분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맛있게 드세요"하고 인사를 하고, "감사합니다"란 답을 들으면서도.

그때 김 신부가 다가왔다. 그는 도시락을 받아가는 이들을 보며 "보세요, 기적 같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그의 말에 공감하는 듯 끄덕였지만, 속으론 '이렇게 다 줘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이어갔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김 신부는 이렇게 차분히 말했다.

"내가 좋은 사람이고, 너는 배가 고픈 불쌍한 사람이라 밥을 주겠다는 게 아닙니다.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나누는 거예요. 누구든 살면서 어려운 시기를 만날 수 있잖아요. 그때 손을 잡고, 넘어져 있지 말라고, 일어나라고, 같이 걸어갈 수 있다고. 그게 안나의 집 역할이에요. 아름답지 않나요."

벚꽃잎처럼 보드라운 그 말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머금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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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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