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싫지만 고이케는 더 싫어"..日 첫 女총리 노리는 '여걸'

전수진 입력 2020. 4. 12. 05:00 수정 2020. 4. 12.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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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장에서 아베 총리를 쏘아보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아베 총리와 오랜 애증 관계다. [지지통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에겐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적일까.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지사 얘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의 싸움에 전력투구해도 모자랄 판인데 아베 총리가 고이케 지사와의 신경전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본 안팎에서 나온다. 고이케가 누구길래.

먼저, 간단 팩트 몇 개.
1. 최초의 여성 도쿄도지사

2. 최초의 여성 방위상(국방부 장관)
3. 영어뿐 아니라 아랍어도 유창한 몇 안 되는 일본 정치인
4. 방송국 앵커 출신

이름의 일본어 의미로만 따지면 ‘작은 연못(小池)의 백합의 아이(百合子)’라는 부드럽고 청초한 이미지인데, 실제와는 거의 180도 다르다. 할 말은 하고 - 그것도 세게 - 말뿐 아니라 행동도 확실하다. 좋게 보면 박력 넘치고 나쁘게 보면 과격한 여성 정치인으로, 호불호가 확실히 갈린다. 그를 두고 ‘여걸’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배경이다. 적어도 일본 정계에선 드문 여성 정치인인 것만은 분명하다.

지난 2017년 '도민 퍼스트 당'을 만들어 아베 총리의 여당보다 도의회 당선인을 더 많이 배출했던 당시의 고이케 지사. [AFP=연합뉴스]



‘쎈캐’ 여성 정치인

일본 정계는 보수적 성향으로 따지자면 아시아에선 둘째가라면 서럽다. 일본 남성 정치인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뷰 또는 기고문에서 언급한다. 고이케 지사를 두고 한 말들만 몇 개 모았다.

“여자는 생리를 하니까 정치엔 맞지 않는다.”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도쿄 도지사. 이 말의 과학적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짙은 화장을 한 여자에게 도쿄를 맡길 순 없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도쿄도지사. 역시 과학적 근거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일본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고이케 지사는 이런 언급에 “이젠 뭐 익숙해졌다”며 쿨하게 넘긴다고 한다. 나름 ‘쎈캐(센 캐릭터)’인 셈.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인은 새로운 것을 원한다”며 “내가 여성이었기에 도지사에 당선될 수 있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유창한 영어로 통역 없이 진행한 인터뷰였다.

고이케 지사의 과거 중의원 선거 당시 출마 포스터들. [중앙포토]


2016년 8월 일본 역사상 최초로 여성 도쿄도지사에 당선된 고이케 지사의 궁극적 목표는 도쿄 치요다(千代田)구 총리 관저에 입성하는 것이다. 1952년생인 그의 올해 나이는 만 67세. 적지 않은 나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에서 그가 어떤 리더십을 발휘하는지가 총리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선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고이케는 일찌감치 신종 코로나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문해왔다. 아베 총리와 갈등을 빚고 있는 지점이다. 둘은 도쿄올림픽 준비 상황에선 협조를 해왔지만 오랜 애증의 역사를 갖고 있다. 신종 코로나 대응에서 이런 갈등이 폭발할 조짐도 보인다.

고이케 지사는 지난달 23일 “도쿄 봉쇄” 가능성을 언급하며 강력 대응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경제를 최우선해야 하는 아베 총리로서는 골치 아플 수 있는 부분이다. 반대하자니 국민 건강이 우려되고, 찬성하자니 경제가 주저앉을 판이기 때문.

고이케 지사는 지난달 25일 생방송 회견을 자청해서는 ‘감염폭발 중대국면’이라고 쓴 종이를 흔들었다. 중앙 정부를 향해 강력 대응을 촉구하면서다. 아베 총리로서는 잔뜩 약이 오르는 상황이다.

지난달 12일 아베 총리와 만나 신종 코로나 예방을 위한 '주먹 인사'를 나누는 고이케 지사. [AP=연합뉴스]


“권력 냄새를 잘 맡는다”…‘철새’ 오명도

고이케 지사는 1992년 정계에 입문했다. TV 도쿄 등 방송국에서 앵커 등으로 활약하며 얼굴을 알린 뒤였다. 아랍어 통역 등을 하기도 했다. 갑자기 웬 아랍어냐고 궁금할 분들을 위해 학력을 짚고 넘어가자.

고이케 지사의 아버지는 무역업을 했고, 이집트 등 중동에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고이케는 이집트 카이로의 아메리칸 대학에 유학했는데, “유엔 공용어에 아랍어가 추가될 것”이라는 신문기사를 보고 결심을 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가 이 대학을 수석 졸업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기엔 사실관계가 불명확하다.

아사히(朝日)신문 출신의 정치 비평가인 다카하시 고스케(高橋浩祐)는 중앙일보에 “학력 위조 논란에 대해 고이케 지사는 설명을 꺼리고 있다”며 “많은 이들이 이 때문에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고 전했다. 다카하시 역시 대학 시절 고이케 지사의 지지자였으며 그의 선거 캠프에서 자원봉사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고이케 유리코 지사의 뉴스 앵커 시절. [중앙포토]


다카하시는 “고이케는 상당히 영리한 정치인”이라며 “권력을 쥐고 있거나, 쥘 것이 유력한 거물 정치인들에게 줄을 잘 섰고 복종하면서 자신의 터를 닦아왔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이케 지사의 이력은 탈당과 출당, 창당의 역사다.

정계 입문은 일본신당에서 비례대표 참의원으로 했고, 이후 중의원에서 내리 8선을 했다. 2002년 여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에 입당할 때까지 일본신당→신진당→자유당→보수당 등 다섯 차례나 정당을 바꿨다. 정계 실력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때그때 당을 옮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다 아베 총리와 갈등을 빚은 뒤엔 탈당해 2016년 도지사 선거에선 무소속으로 당선했다.

2005년 당시 고이즈미 당시 총리와 손잡았던 고이케 도쿄도지사. 고이즈미 총리는 고이케에게 환경부 장관 자리를 맡겼다. [지지통신]


이후 2017년엔 도의회 선거에서 ‘도민 퍼스트’라는 이름의 당을 리드하며 도의회 제1당으로 이끌었다. 아베 총리의 무릎을 꿇렸지만, 지방선거라는 한계가 있었다. 기세를 몰아 ‘희망의 당’ 대표에 취임하며 야당 세력을 결집하고자 했지만 결국 구설이 문제였다. “(보수가 아닌 사람들은) 배제하겠다”는 발언으로 인해 ‘배제의 정치를 하려는 것이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희망의 당'은 중의원 선거에서 참패했고, “고이케의 밑천이 드러났다”는 말도 나왔다.


환경부ㆍ국방부 장관…‘일본의 콘돌리자 라이스’ 별명도

고이케 지사는 그 와중에 입각도 두 번이나 했다. 첫 입각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시기 환경상(환경부 장관). 당시 여름 냉방 전력 절약을 위한 ‘쿨 비즈(반팔 등 복장 간소화)’ 캠페인을 성공시켰다. 이후 아베 총리 1기 정부에선 여성 최초 방위상을 역임했다. 미국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 여성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에 비견돼 ‘일본의 라이스’라는 별명도 얻었다.

2016년 리오 여름올림픽 폐막식에서 다음 올림픽 개최지인 도쿄의 도지사 자격으로 오륜기를 넘겨받은 고이케 지사. 기모노를 입었다. 옆에서 박수 치는 인물은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연합뉴스]


혹시라도 여기까지 읽고 고이케 지사에게 호감을 갖게 됐다면, 다음 문단을 읽으시길 권한다.


보수 우파 포퓰리즘의 기수

만약 고이케 지사가 총리가 된다면? 이미 나빠질 대로 나빠진 한ㆍ일 관계는 더 위태로울 수도 있다. 대표적 일화가 있으니 2018년 9월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모식이다. 이 추모식엔 대대로 도쿄도지사가 자신의 명의로 추도문을 보내왔다.

고이케 지사 역시 당선 후 첫 추모식이었던 2017년엔 추도문을 보냈다. 그러나 2018년엔 거부했다. “이미 지난 3월 도쿄대공습 추모식에 참석했다”는 게 이유였지만 일본 안팎에선 그의 강경 보수 시각이 반영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고이케 지사는 외교·안보에 상당한 애착과 자신감을 갖고 있다. 여기에 그의 특유의 승부사 기질까지 더한다면 한ㆍ일관계에 좋은 변수일 수만은 없다. 독도와 위안부 문제에서도 공개적으로 일본의 보수파를 대표하는 발언을 수차례 해왔다.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산타 복장을 하고 행사에 참석한 고이케 지사. 그는 애니메이션 코스프레 차림으로도 종종 행사에 등장한다. [EPA=연합뉴스]


그렇다면 실제로 그가 총리가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다카하시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유에 대해 그는 “대중적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들 사이에서 고이케 지사에 대한 평은 상당히 좋지 않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다른 일본 정치 전문 기자 역시 중앙일보에 “‘고이케 총리’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해도 좋다”며 “아무리 그가 유력 정치인이라고 해도 일본은 아직 여성 총리를 맞을 준비가 안 됐다”고 설명했다. 다른 일본 전문가는 역시 익명을 전제로 “아베도 싫지만, 고이케는 더 싫다”고 잘라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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