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중앙일보

툭툭 손맛에 취해 낭패 본다..코로나보다 무서운 고사리 사냥

최충일 입력 2020.04.12. 13:21 수정 2020.04.1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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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맛있다는 4~5월 제주 고사리
코로나에 채취객 줄었지만, 인기 여전
'고사리 명당' 쫓다가 길 읽는 사고도
제주 길잃음 사고 절반은 고사리 때문
마스크를 착용한 고사리채취객이 지난 10일 오전 한라산의 한 초지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다 . 최충일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주로 혼자 다니다 보니 숲속 깊은 곳은 가지 않고 도로와 가까운 곳만 찾아다닙니다.”
지난 10일 오전 11시 해발 600m 한라산의 한 초지에서 만난 조모(45)씨의 말이다. 조씨는 3~4년 전부터 이맘때면 한라산으로 고사리 사냥(채취)에 나선다. 제주에서는 4~5월이 되면 비 오는 날이 많아진다. 제주 사람들은 이때를 ‘고사리 장마’라고 부른다. 이때 고사리가 가장 연하고 맛있다고 한다.

마스크를 착용한 고사리 채취객이 지난 10일 오전 제주 한라산 자락의 들판에서 꺾은 고사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조씨는 지난해까지 산속에서 길을 잃을까봐 친지나 친구들과 짝을 이뤄 다녔다. 하지만 올해는 대부분 혼자 다니고 있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다. 조씨는 “고사리 따는 분이 예년보다 많이 줄었다”며 “과거에도 이맘때면 꽃가루나 중국발 미세먼지 때문에 마스크를 꼭 착용했는데, 올해는 좀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말했다.

한 고사리 채취객이 지난 10일 오전 제주 한라산 자락의 들판에서 채취한 고사리를 들어 보이고 있다. 최충일 기자

임모(65)씨는 “고사리를 따다 타인을 만나면 2m 이내로 가까이 가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경험상 고사리 딸 때는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며 “코로나도 걱정이지만 고사리를 꺾으며 걷다 길을 잃지 않으려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다.

고사리는 제주의 중산간 지대에 주로 분포하는데 ‘툭툭’ 꺾이는 손맛에 취해 땅 밑의 고사리만 보고 걷다 숲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제주에서는 ‘고사리 명당은 딸이나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혼자만 알고 있는 '명당'을 찾다가 길을 몰라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제주도소방안전본부에 따르면 지난 11일 오전 8시쯤 서귀포시 대천동 사거리 주변에서 전날 실종된 송모(72)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송씨는 전날(10일)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백약이오름 주변으로 고사리를 캐러 간다며 집을 나섰다. 지병이 있는 송씨가 저녁이 돼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이 이날 오후 6시 52분쯤 실종 신고를 했다.

마스크를 착용한 고사리채취객이 지난 10일 오전 한라산의 한 초지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다 . 최충일 기자

지난 1일에도 고사리 등 산나물 채취에 나섰다가 길을 잃은 70대 여성이 실종신고 10시간 만에 발견됐다. 이 여성은 저체온증을 호소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최근 5년간(2015∼2019년) 제주에서 발생한 길 잃음 사고는 모두 511건이다. 이 중 4∼5월에 53.6%인 274건이 발생했다. 고사리 등 산나물을 꺾다 길을 잃은 경우가 209건(40.9%)으로 가장 많았고 올레·둘레길 탐방 43건(8.4%), 오름 등반 41건(8%) 순이었다.

지난 2017년 관광객들이 제주도 한라산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도소방안전본부는 지난달 26일 ‘길 잃음 안전사고 주의보’를 발령했다. 마을 지리에 밝은 의용소방대원 등을 안전길라잡이로 지정해 운영하는 제도다. 도 소방안전본부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로 봄철 정기 행사는 대부분 취소됐으나, 개별적인 고사리 채취와 올레길 탐방 등은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길 잃음 사고에 대비하려면 항상 일행과 함께하고 휴대폰과 호각 등 자신의 위치를 알릴 수 있는 장비를 휴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난 10일 제주 한라산 자락에 자라난 고사리. 최충일 기자

고사리는 ‘산에서 나는 소고기’라고 불릴 정도로 영양이 풍부하다. 단백질·칼슘·철분·무기질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과거 ‘궐채(蕨菜)’라는 이름으로 임금께 진상됐다. 수확 후 말렸다가 1년 내내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제주산 건조 고사리는 소매가로 100g당 1만원 이상에 거래된다.

한편 4월 말 서귀포에서 열릴 예정이던 제25회 한라산청정고사리축제는 코로나19로 취소됐다.

제주=최충일 기자 choi.choongi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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