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평양 낙랑 무덤의 비밀, 104년 만에 풀렸다

노형석 입력 2020. 4. 12. 19:26 수정 2020. 4. 1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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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학계 공동으로
현존 출토품 351점 첨단 기법 분석
사라지거나 몰랐던 유물도 찾아내

부장품 상당수가 국제 교역품
중앙 정권에 예속력 강하지 않고
남북방과도 교류한 낙랑 사회 입증

옛 무덤 등의 유적을 파서 살피고 역사적 사실을 연구하는 근대 고고학 발굴조사가 한반도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 구한말~일제강점기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일본 경찰과 관리의 지원 아래 신라 도읍인 경주와 고조선·고구려 도읍인 평양 일대의 고분들을 거리낌 없이 파헤쳤다. 도굴에 가까운 무더기 발굴을 자행하고, 막대한 양의 고대 유물을 일본에 반출했다.

이렇게 진행된 일제의 고분 조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신라의 금관 문화와 돌무지덧널무덤의 얼개를 알려준 1920년대 경주 금관총·금령총 조사다. 하지만 고고학 전문가들은 한반도 고대 고분 발굴사업의 본격적인 시작이자 이후 고고학 조사의 기틀을 세운 결정적 사건으로 1916년 9~10월 평양 대동강변에서 벌어진 ‘석암리 9호 낙랑고분 발굴’을 꼽는다.

평양 석암리 9호분은 기원전 1세기 고조선 멸망 뒤 한반도 서북지방에 진출한 중국 한대 낙랑 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유적이다. 발굴조사를 통해 나무덧널(목곽)로 짜여진 낙랑의 귀틀 무덤 얼개가 처음 확인됐으며, 국내 출토 금공예품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명품으로 평가되는 일곱 마리 용 문양이 돋을새김된 금제 띠고리 장식(버클)을 비롯해 한자와 무늬가 들어간 칠기류, 거울, 제사용 술을 바치는 용기인 동정, 장식 철검 등의 화려한 유물들이 잇따라 쏟아졌다. 상당수 유물이 한나라의 전형적인 생활용기와 장신구류여서 평양 일대 낙랑군이 한나라 식민지였다는 일본의 식민사관이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 104년 만에 평양 석암리 9호분 낙랑시대 무덤에 대한 단독보고서를 국내 학계 전문가들과 함께 처음 펴냈다. 일제는 이미 1917년, 1925년, 1927년에 걸쳐 석암리 9호분을 포함한 일대 고분들을 함께 묶어 대규모 발굴보고서를 낸 바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석암리 9호분의 유물 전모와 분석 내용, 발굴 상황 등을 종합 정리한 보고서는 발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방 뒤 한국 고고 발굴의 시원으로 꼽히는 석암리 9호분의 발굴조사를 정리하는 것은 학계의 오랜 숙제였다. 그동안 내용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다가 박물관 학예진과 정인성 영남대 교수(고고학), 주경미 박사(공예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 힘을 모아 이번에 결산 보고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보고서는 현존 90건 351점에 이르는 9호분 출토품에 대한 완전한 조사와 분석 결과를 담았다. 각 유물을 시티 및 엑스레이 등으로 샅샅이 분석하고 50년대 이후 비슷한 유적과 유물에 대해 발굴연구한 한·중·일 고고학계의 성과와 대조해 무덤과 부장품의 성격을 상세하게 파악했다.

세키노 다다시 등 발굴 당시 일본 학자들은 출토품을 한나라 중원 유물로, 무덤 주인은 중원에서 파견된 식민지배자로 단정했다. 이와 달리 보고서에서는 따뜻한 술을 담는 용기인 청동온주준이나 대모 장식 등 부장품 상당수가 중국 광시성·광둥성이나 베트남 등 중원 남쪽에서 온 유물임을 일일이 고증하면서 낙랑 지역이 중원 못지않게 남방 지역과도 밀접하게 교역했음을 드러냈다.

이 무덤의 가장 유명한 출토품인 금제 띠고리 유물도 중국 중원에서 발굴 사례가 없고 서역의 신장이나 내몽골 지역에서 유사한 사례가 나타난다고 한다. 유물 자체가 북방 유목민의 전형적인 공예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중국 중원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국제 교역망에 따라 사들인 것들로 보았다. 낙랑 사회가 생각보다 훨씬 열린 사회로, 중국 중원 정권에 정치적으로 강하게 예속되지 않았을 것이란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박물관 쪽은 또 시티(CT) 촬영을 통해 그동안 망실되거나 몰랐던 유물의 존재를 새로 파악하기도 했다. 무덤 목관 바깥에서 출토된 금장식 둥근고리 작은쇠칼(철제 환두 소도)은 그동안 망실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박물관 쪽이 다른 금속 유물 보존처리를 위해 녹을 제거하다 그 존재를 새롭게 확인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나경 학예연구사는 “학계에서는 석암리 9호분 출토품 중 금제 띠고리 같은 주요 명품만 파악했을 뿐 전체 유물 내역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며 “출토품의 구체적인 전모와 양상을 보여주면서 당시의 낙랑 사회가 중국 외의 남북방 지방과도 활발히 교류했던 단면을 입증한 것이 보고서의 가장 큰 의의”라고 말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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