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정은경 본부장이 52시간제 대상이었다면..

나지홍 경제부 차장 2020. 4. 14.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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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본부장 "1시간보다 더 잔다".. 민간이라면 근로기준법 위반
규제 안한 덕분에 모범 방역국.. 시대 역행 규제 빨리 혁파해야
나지홍 경제부 차장

"한국에서 골드만삭스나 JP모건 같은 세계적인 금융회사가 나올 수 있을까요?"

최근 금융인들과 모임에서 누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실 답이 너무 뻔했다. "선진국에 비해 금융업 역사가 일천하고 자본 축적도 안 돼 있어서" "원화가 기축통화도 아닌데 무슨 수로" "국제 금융계 공용어인 영어 실력이 일취월장해야" 등 부정적 이유는 차고 넘쳤다. 그런데 질문자의 답은 달랐다. "금융업은 사람 장사인데, 52시간제 때문에 능력과 경험을 갖춘 인재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이다.

월가의 투자은행(IB)을 다룬 책 '영머니(Young Money)'에는 미국 명문대를 졸업한 인재들이 얼마나 강도 높게 일하는지 잘 나와 있다. 근로시간이 대표적이다. "IB도 근무시간이 9 to 5입니다. 그런데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5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오전 5시에 퇴근해요." IB의 주당 근로시간은 통상 90시간이지만, 대형 M&A(인수·합병) 같은 중요한 미션이 주어지면 밤샘과 휴일 근무도 다반사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도 지원자가 몰리는 것은 일한 만큼 확실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미국 연봉 비교 사이트에 따르면, IB의 대졸 신입 직원 연봉은 7만~15만달러(약 8500만~1억8000만원)이고 3년 차가 되면 12만~35만달러를 받는다. IB 출신 국내 금융사 대표는 "성과와 기여도에 따라 연봉과 승진이 크게 달라지니까 누구나 눈에 불을 켜고 일한다"며 "투자은행원은 40대에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은퇴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반면 한국에선 직원이 더 오래 일하고 싶어도 회사가 막는다. 높은 연봉을 감당할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52시간을 넘으면 회사 대표까지 형사처벌받기 때문이다.

52시간과 90시간의 차이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베스트셀러 작가인 맬컴 글래드웰은 '아웃라이어'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주장했다. 어떤 분야든 전문가가 되려면 최소 1만 시간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당 52시간씩 꼬박 일하면 1만 시간을 채우는 데 192주가 걸린다. 3년 9개월쯤 된다. 반면 90시간씩 일하면 이 기간이 111주로 단축된다. 똑같은 전문가를 육성하는 데 한쪽은 2년 걸리고 다른 쪽에선 4년 걸린다면 어느 쪽이 경쟁에서 이길까. 불 보듯 뻔하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코로나 사태의 영웅으로 꼽은 정은경 질병관리본부장과 질본 공무원들은 역설적으로 52시간제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계적인 찬사를 받을 수 있었다. "1시간보다는 더 잔다"는 발언이 화제가 될 정도로, 오전 7시부터 밤 12시까지 숨돌릴 틈 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일과는 투자은행도 저리 가라 할 만큼 살인적이었다. 만일 공무원이 아니었다면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졌을 것이다. 집단감염이 발생한 대구·경북 지역에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본 코로나 방역의 '1등 공신' 의사·간호사들도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52시간제 대상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의료진과 공무원을 배제한 주 52시간제가 한국을 방역 모범국으로 만든 '신의 한 수'가 된 것이다.

업종·직종을 가리지 않는 획일적 주52시간제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갈라파고스식 규제다. 미국·유럽 등 선진국을 봐도 우리나라처럼 연구·개발직이나 사무직까지 52시간제를 강제하고 처벌하는 나라는 없다. 이래서는 치열한 글로벌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새로 구성될 21대 국회에서는 이런 비합리적 규제들을 혁파해 민간에서도 제2, 제3의 정은경이 나올 기반을 마련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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