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잠재적 가해자와 페미니스트
[경향신문]
내가 무척 아끼고 좋아하는 후배 K. 그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함께 활동하는 동료 교사이기도 하다. 언젠가 교사회의 뒤풀이 자리에서 사람들이 “형은 K를 왜 그렇게 좋아해요?”라고 묻기에, 그 친구가 ‘사회화가 안되어서’ 그런 것 같다고 답변했다가 예상치 않게 큰 웃음을 유발한 적이 있다. 나에게 그건 꽤 진지한 답변이었는데 말이다. 사회화된다는 건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 즉 문화를 습득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30년 이상 살아온 K의 사고방식과 계산법은 너무나 비자본주의적이며, 가부장제 사회에서 성장해온 남성이면서 매우 탈가부장적이기도 하다. 그에게서 늘 많을 걸 느끼고 배운다.
얼마 전 K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과 ‘n번방’ 성범죄 사건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그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한국 남성들은 모두 잠재적 가해자라고 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남성도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럼 결국 잠재적 가해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잖아요. 좀 혼란스럽기도 한데, 형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의 질문에 나는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했다. 다른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일단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에 대해 나 스스로 어떤 확답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활동가를 업으로 삼고 있는 나에게 ‘○○주의자’라는 건 상당히 무거운 언명이었다. 마르크스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고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인 건 아니고, 환경 문제에 관심을 둔다고 모두가 생태주의자라는 자기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단순히 성차별에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을 견지한다고 페미니스트라 칭해질 수 있는 건 아닐 거라는 생각. 그러니까 그 신념을 철저히 내면화할 뿐만 아니라 치열한 일상적·사회적 실천을 벌이는 이들에게만 그런 타이틀이 부여될 수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동안 내가 역설적으로 너무 안일한 생각을 가져왔음을, 페미니스트라는 기준을 높게 설정해 두고 스스로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부여해왔음을 인정하며 반성하고 있다. n번방 성범죄 사건을 언론을 통해 처음 접했을 때, 많은 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26만명이라는 가입자 수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n번방 이전 존재했던 ‘AV스누프’나 ‘웰컴투비디오’ 같은 수많은 디지털 성범죄의 실상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국내 영화 시장의 13배에 달하는 성착취 산업의 거대한 규모와 악랄한 구조에 대해서도. 요컨대 그런 문제에 대해 나 역시 그동안 무관심했고, 그런 무관심 덕분에 우리 사회의 성범죄는 제대로 된 처벌 없이 더욱 기승을 부릴 수 있었다.
이제 K가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 ‘성범죄 재난 국가’라 명명해야 마땅할 대한민국에서 지금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잠재적’ 가해자인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때, 즉 ‘여성-되기’를 시도할 때, 설령 페미니스트가 되는데 반복적으로 실패한다 하더라도 ‘현행적’ 가해자와 공모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성찰적 도전이 이어질 때에만, 이 땅의 여성과 남성은, 그리고 n개의 성을 지닌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평등한 인간이자 동료 시민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김도현 <장애학의 도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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