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이 보수는 왜 모습을 안 드러냈나

윤호우 선임기자 2020. 4. 18.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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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제1야당인 미래통합당이 마지막까지 기대했던 것은 ‘샤이 보수’였다. 평소에 보수성향을 갖고 있지만 여론조사에서는 드러내지 않은 샤이 보수가 대거 투표장에 나가 보수정당을 찍을 것이라 전망한 것이다. 때문에 여론조사에서 통합당 후보가 10%포인트가량 밀리더라도 선거에서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봤다. 4월 15일 저녁 출구조사 결과가 패배로 발표된 이후에도 통합당 측은 기대를 접지 못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 열세였던 후보들은 낙선했다. 심지어 여론조사에서 박빙이었던 지역도 대부분 더불어민주당의 승리로 나타났다.

4월 15일 서울 마포구 서울동교초등학교에 마련된 망원2동 제3투표소에 시민들이 투표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 연합뉴스

거대 양당 정면충돌로 ‘숨은 표’ 사라져

실제 총선 결과 ‘샤이 보수’는 거의 없었다. 영남권을 제외한 전국에서 ‘샤이 보수’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도권에서 민주당은 거의 모든 지역구를 휩쓰는 압승을 거뒀다. 민주당은 서울에서 전체 49석 중 41석을, 경기도에서 59석 중 51석을, 인천에서는 13석 중 11석을 차지했다. 샤이 보수가 있었다면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현상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은 샤이 보수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안일원 리서치뷰 대표는 “국면에 따라 샤이 보수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이번 총선을 앞두고 샤이 보수는 거의 없었다”면서 “샤이 보수가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게 아니라 아예 없었다”고 말했다. 안 대표가 이번 총선을 앞두고 4월 14일 작성한 리서치뷰의 보고서에는 “샤이 보수는 가상 번호 조사가 도입된 이후 ARS(자동응답시스템) 조사 기준 대략 1∼2%포인트 수준으로 미미하다”면서 “이번 총선에서 샤이 보수는 특별한 변수로 작용하지 못할 것”이라고 나타나 있다. 샤이 보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론조사에서 통합당 후보가 10%포인트 차이로 지고 있을 경우 실제로 그 정도 차이가 난 것으로 봐야 한다.

이같이 샤이 보수가 나타나지 않은 이유로는 거대 양당이 정면으로 격돌하는 양상이 첫 번째 요인으로 지적됐다. 안 대표는 “제동장치가 없는 두 개의 지각판이 정면충돌했던 양상”이라면서 “양측 지지층이 대거 결집했다”고 말했다. 이 상황에서 ‘샤이 보수’가 있을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엄경영 시대정신연구소 소장은 “그동안 통합당은 열세를 인정하면서도 ‘숨은 표’로 1당은 문제없다고 주장했다”면서 “하지만 숨은 표는 투표율이 높거나 진영 대결이 격화하면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숨은 표’란 샤이 보수와 같이 여론조사에서 나타나지 않지만 실제 투표 결과에서 나타나는 표를 말한다. 엄 소장은 “여론조사에서 일정 비율에 따라 고령 응답자와 20대 응답자의 표본을 정한다”면서 “하지만 실제 투표에서는 고령 유권자의 투표율이 높고, 20대 유권자의 투표율이 낮게 되면 편차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숨은 표’로 보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숨은 표’가 고령 유권자에게서 편차를 갖게 되고, 대부분 보수성향을 띠기 때문에 ‘샤이 보수’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엄 소장은 “이번 총선에서는 고령 유권자의 투표율과 20대 유권자의 투표율이 다 같이 높아져서 샤이 보수라고 하는 편차가 존재하지 않았다”며 “게다가 고령 유권자 중 50대가 대거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샤이 보수라는 편차가 거의 없어졌다”고 말했다. 엄 소장은 “이번 총선에서 표가 숨어 있을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에게 가장 곤란한 연구대상은 샤이 보수나 샤이 진보였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여론조사를 통해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의 압승이 점쳐졌지만, 투표 결과는 달랐다. 민주당이 비록 한 석 차이지만 새누리당을 누르고 제1당이 됐다. 진보임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사에서 진보임을 밝히지 않은 ‘샤이 진보’들이 투표장으로 대거 나섰다는 분석이 나왔다. 때문에 통합당에서는 20대 총선의 ‘샤이 진보’처럼 21대 총선에서 ‘샤이 보수’의 등장을 잔뜩 기대했다.

역대 총선에서 ‘샤이 보수’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많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역풍이 크게 불었다.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점쳐지는 상황에서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훼 발언’ 논란이 일었다. 선거에서는 탄핵 역풍 때문에 숨을 죽이고 있던 샤이 보수표가 쏟아져 나왔다. 열린우리당은 152석이라는 과반 의석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안일원 대표는 “당시 노인 폄훼 발언 논란 직전 여론조사 결과와 비례대표 정당득표율을 고려할 때 샤이 보수 규모는 16%포인트가량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보수정당인 한나라당이 121석을 얻는 데에는 샤이 보수 16%포인트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2017년 초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 이후 샤이 보수는 다시 생겨났다. 여론조사에서 보수성향임을 감춘 응답자가 많아졌다. 때문에 2018년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은 ‘샤이 보수’의 존재를 기대했다. 하지만 참패로 끝나면서 ‘샤이 보수’가 끝내 투표장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해석이 나왔다.

4월 15일 저녁 울산시 북구 오토밸리복지센터에서 개표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 연합뉴스

“수도권은 샤이 보수를 담을 그릇이 없다”

이번 총선에서도 ‘샤이 보수’는 통합당의 기대만 불러일으켰다. 홍형식 한길리서치 소장은 “이번 총선에서 여론조사 결과 보수성향이 30% 가깝게 나왔다”면서 “샤이 보수는 지난해 조국 법무부 장관 사태 때 이미 커밍아웃을 해 자신을 보수라고 대답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론조사에서 보수성향을 감춘 ‘샤이 보수’가 아니라, 분명히 ‘보수’라고 입장을 표명했다는 것이다. 홍 소장은 “이들은 ‘샤이 보수’가 아니라 ‘샤이 통합당’으로 문재인 정부를 심판하는 입장이지만 통합당 지지자라고 떳떳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샤이 보수를 다른 시각으로 보기도 했다. 여론조사에서 10%포인트가량 지는 통합당 수도권 후보에 대해 통합당의 한 인사는 “여론조사에서 10%포인트 뒤지는 것은 영남권과 수도권을 다르게 봐야 한다”면서 “영남권은 통합당이 조직을 갖고 있기 때문에 10%포인트 차이를 극복할 수 있지만, 수도권은 이미 2018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함에 따라 통합당의 조직이 무너졌기 때문에 차이를 극복할 수 없다”고 했다. 이 인사는 “샤이 보수를 담기 위해서는 조직이 중요한데 지금 수도권에서 샤이 보수를 담을 그릇이 없다”고 말했다.

이번 총선에서 샤이 보수는 영남권에서 막판에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안 대표는 “수도권을 비롯한 비영남권에서 사전투표율이 높아지면서 4월 15일 영남권과 서울 강남벨트, 분당 등지에서 보수표가 대거 결집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를 굳이 이름 붙이자면 샤이 보수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호우 선임기자 hou@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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