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율의 정치 읽기] 슈퍼 파워 與..그라운드 제로 野

2020. 4. 20.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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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가 제21대 총선일인 4월 15일 국회도서관 강당에 마련된 미래통합당·미래한국당 개표상황실에서 총선 결과 관련, 당대표직 사퇴를 밝힌 후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선거는 여러 가지로 연구 대상이 될 만하다.

우선 1996년 15대 총선 이래 최고의 투표율을 기록했다. 2000년 이후 치러진 5번 총선의 평균 투표율은 55.22%다. 66.2%라는 투표율은 가히 경이로운 수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투표율이 높으면 야당이 유리하다. 국민 대다수가 여당과 정부에 만족하면 보통은 투표율이 낮다. 거꾸로 정부에 대한 불만이 많을수록 투표율이 높아질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19 사태 초기 많은 국민은 마스크 문제로 정부에 불만을 가졌다. 하지만 이제는 공적 마스크를 사기 위해 줄을 설 필요가 없어졌고, 코로나19 사태를 정부가 잘 관리해 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하면서 정부에 대한 만족도가 다소 높아졌다. 일부는 이런 요인이 여당 압승의 원동력이 됐다고 분석한다. 단순히 이 때문에 1996년 이후 최고의 총선 투표율을 기록했다 하기는 어렵다. 정부를 칭찬하기 위해 코로나19 감염 위협을 무릅쓰고 긴 줄을 마다 않고 투표장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투표율이 높았던 이유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이론적으로 투표율이 높은 경우는 정치적 효능감이 높아졌을 때, 혹은 누적된 분노와 실망감이 높을 때다. 정치적 효능감이란 자신의 정치적 목소리가 실제 정치 과정에 반영된다는 주관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이런 정치적 효능감이 극대화됐던 시기로, 1987년 6·10 민주항쟁과 지난 2016년 겨울의 촛불집회를 꼽을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 표현으로 정권을 무너뜨렸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사건이다. 이런 정치적 효능감은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 따라서 2016년 겨울에 가졌던 정치적 효능감이 이번 투표까지 이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결국 분노나 상실감이 크기 때문에 투표율이 높아진 셈이다. 여기서 분노 혹은 실망의 대상이 누구일까. 일반적으로 정치적 분노 혹은 실망의 대상은 여당일 확률이 높다. 야당은 권력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적 분노 혹은 실망을 자아내기 힘들다.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민심을 보면 마치 분노의 대상이 야당인 것처럼 보인다. 높은 투표율에도 불구하고 여당이 압승하고 야당은 참패했다. 여기서 중요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념 지형의 변화다.

이론적으로 정치적 이념 지형은 단시간 내에 변하기 어렵다. 지난 19대 대선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와 심상정 후보가 획득한 표의 합은, 보수 성향 후보들, 즉 홍준표·안철수·유승민 후보가 받은 표보다 적었다. 탄핵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변을 겪었음에도 진보의 득표가 보수 표보다 적었다. 이는 탄핵 직후까지 기존의 이념 지형이 이어졌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번 총선 결과를 보면 그사이 우리 사회의 이념 지형은 상당 부분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념 지형이 변했다는 것은 진보가 상대적 소수이던 시대는 마감됐고 반대로 이제는 보수가 상대적 소수가 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를 분명히 알린 계기가 이번 총선이다.

작금의 상황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점을 제공한다.

무엇보다 우리 국민 상당수는 정치적 기득권은 진보에 넘어갔지만 사회적 기득권은 아직도 보수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국민이 이런 사회적 기득권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선거를 통해 표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는 앞으로의 우리 사회를 분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향후 경제 상황이 상당히 엄중해질 것 같은데, 이념 지형 변화는 경제 상황 악화에 대한 대응 방법을 변화시킬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보수가 다수였던 시절에는,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 경제 살리기가 우선이고 그래서 기업을 살리자는 위주로 국민 다수가 생각했다. 이제는 국민 다수가 분배를 먼저 생각하는 시대로 전환됐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대두된다.

미래통합당은 오히려 이념 지형의 변화와는 반대로 가는 듯한 전략을 구사했다. 전략적 착오다. 통합당이 이념 지형 변화를 제대로 인지했다면, 이념 지향적 구호나 현 정권에 대한 공격보다는 실용적 대안 제시를 통한 우회적 차별성을 보여줬어야 했다. 그런데 통합당은 보수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진보적 성향으로 변한 중도를 포섭하는 데 실패했다. 막말 논란이 벌어졌을 때 신속히 대처했다면 최소한 수도권에서 이 정도 전멸하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공천 문제다. 미래한국당은 정당 투표에서 나름 ‘선전’했다. 이념 지형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 선전한 것은 결국 공천을 잘했다면 지금 같은 유례없는 참패는 피할 수 있었다는 분석을 가능케 한다.

종합하면 미래통합당에서 ‘미래’는 없어졌다. 미래통합당은 해체 이후 다시 야당을 만드는 작업에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당대표가 물러나고 몇몇이 책임지는 선에서 상황을 넘기려 한다면 큰 오산이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민심은 통합당은 더 이상 야당, 아니 정당으로서의 존립가치가 없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지금 미래통합당이 모든 것을 바꿔야 하는 이유는 단지 선거에서 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정치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든 180석 이상을 보유한 ‘슈퍼 여당’을 상대하려면 소수지만 강한 야당을 만들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차분함이다. 서두른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서두른다면 또다시 민심을 제대로 읽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 차분히 시간을 갖고 완전히 환골탈태해야 한다.

야당에 이렇듯 처참한 쓴소리를 하는 이유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야당의 존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흔히 ‘야당이 바로 서야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한다. 지금은 이런 소리가 한가롭게 들릴 정도로 위중한 상황이다. 경제위기라는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해 대한민국이 계속 건강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 야당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1996년 이후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한 선거가 끝났다. 높은 투표율의 선거에서 나온 결과는 당연히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그런 기초 위에서 야당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야당은 ‘급격한 변화의 중심’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는 ‘그라운드 제로’에 서 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55호 (2020.04.22~04.2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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