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수사관은 무고죄 운운.."내 말 믿어줄까, 두려웠다" [성범죄법 잔혹사 ⑤]

이혜리·유설희·허진무 기자 2020. 4. 24.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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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고소 못하는 피해자

‘나만 참고 입 다물면 돼.’ 대학 내 성폭력 피해자인 ㄱ씨는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가해자는 대학교수였고, ㄱ씨는 제자였다. 피해는 고통스러웠지만 고소할 수 없었다. 좁은 학계에서 보는 눈이 많았다. 그대로 공부하면 미래가 보장돼 있었다.

ㄱ씨가 가해자를 고소한 것은 학교에서 가해자의 다른 성폭력이 공론화되면서였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침묵하는 사이 다른 피해자가 생긴 겁니다. 전 피해를 입고 문제제기를 안 해 다른 피해자를 만든 잘못을 했습니다. 가해자는 감옥에 가야 합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주변에선 ㄱ씨의 고소 결심을 말렸다.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고, 학계에서 매장당할 것이라고 했다.

고소했지만, 고소는 끝이 아니고 시작이었다. 경찰에서 검찰로 사건이 넘어가기까지 1년이 걸렸다. 결국 ㄱ씨는 한국을 떠나기로 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여기는 희망이 없어요.”

성폭력 피해자 지원 활동가 ‘마녀’(활동명)의 설문조사에 참여한 한 성폭력 피해자의 사례다. 설문조사에 응한 피해자 64명 중 30명은 신고·고소를 하지 못했다. 나머지 중에서도 상당수가 피해가 발생한 지 한참 지나 고소를 했다. 피해가 심각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고소 후 통과해야 할 수사·재판 절차의 높은 관문이 두려워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고소하지 말라는 회유를 받아서 등 이유는 다양하다.

수사기관은 피해자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기보다는 피해 후 즉각 고소하지 않은 경위를 캐묻는다. 2차 피해를 우려한 피해자들은 고소를 주저하고 포기한다.

피해자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사법시스템은 가해자를 처벌하기는커녕 또 다른 암수범죄(숨은 범죄)만 만들어낸다. 성폭력 피해자의 고소와 경찰·검찰의 수사를 둘러싼 악순환의 고리다.

‘왜 바로 고소 안 했나?’

취조하듯 캐묻는 수사관… 기나긴 사법절차에도 지쳐

법적 호소 꺼리는 이유로 “2차 피해 우려” 최다

■ 왜 신고하지 못했나

설문조사 응답자들에게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신고·고소 등 절차로 나아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신고·고소 후 많은 시간과 비용 소모, 피해를 증명하는 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우려하는 답변이 가장 많았다.

반면 수사·재판에 의해 가해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은 피해자들에게 없었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의 말이다. “고소를 한 뒤 겪게 될 불이익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는 돈도, 사람도 없다. 기억 하나만 가지고 싸우려면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데 그럴 용기도 없었다. 이혼 후 가장으로서 딸들을 키워야 했기에 포기하는 게 낫다고 봤다.”

다른 피해자도 “수사 과정에서 겪게 될 일들이 두렵고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한 강간미수 피해자는 이런 말도 했다. “뉴스나 주변에서 주는 신호는 성폭력 피해를 당한 뒤에 고소하는 건 모든 것을 걸어도 어렵다는 것이다. 피해자를 의심하는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더 큰 상처를 받을 것이 뻔하다. 더구나 사건 당시 난 40대 후반이었고, 나이가 많은 피해자들이 어떤 일을 겪을지 충분히 예견되어 포기했다.”

10살 때 아버지 친구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피해자는 부모에게 피해 사실을 알렸지만 오히려 부모로부터 ‘말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가해자를 고소하는 순간 피해자의 인간관계는 단절되고 공동체로부터 외면당할 수 있다.

“가족들은 내 보호자가 아니었다. 작은 도시였기 때문에 도움을 청할 곳도 없었다. 소문이 나면 그곳에서 못 산다고, 잊어버리라고 그랬다. 그래서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는데 여전히 고통스럽다. 겨우 일상생활을 하고 있지만 부모가 아직 그곳에 있어서 일이 있으면 내려가야 한다. 죽고 싶다.”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고용관계에 있는 경우엔 고소가 생존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한 강간 피해자는 “불안정한 비정규직이라 즉각적인 항의도, 고소도 하지 못했다”며 “가해자가 해당 업계에서 가지는 영향력이 매우 컸기 때문에 피해를 알리면 나는 매장될 것”이라고 말했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성폭력 범죄의 특성은 피해자가 신고·고소 여부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피해자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따진다. 이는 피해자에게 큰 부담이다. 여러 피해자들이 ‘기억 외에는 증거가 없다’는 점을 신고·고소하지 못하는 이유로 설명했다.

신고·고소한 경우는 “고통 벗어나 살기 위해서” “또 다른 피해 생길까봐”

■ “살기 위해서” 성폭력 피해 고소

가해자를 신고·고소한 피해자들은 어떤 심정으로 신고·고소를 할까. 피해자들의 답변에선 그들이 처한 상황이 드러난다. 피해자들의 삶은 피해를 입은 순간부터 뒤틀리기 시작한다. 일상에 집중하지 못하고, ‘내가 잘못해 범죄가 발생했다’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겪는다. 가해자를 신고·고소한 피해자들은 ‘살기 위해서’ 했다고 말했다. 한 피해자는 “고소를 해야 내가 숨을 쉴 것 같았다. 과거가 여전히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고 했다. 다른 피해자는 “이 일을 해결해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했다. “내가 아프고 힘든 게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법으로 인정받고 싶었다”는 말도 있었다.

자신의 피해를 극복하고 동시에 가해자에게 책임을 지워야겠다는 생각을 통해 신고·고소로 나아간 경우도 있었다. 한 피해자의 말이다. “몇 년간의 연애를 하면서 가해자로부터 지속적으로 데이트폭력을 당했지만 그게 폭력인지도 몰랐다. 자살을 몇 번 시도하고 관계를 정리한 수년 뒤, 다른 데이트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이 당한 피해를 폭로한 글을 보고서야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깨달았다. 가해자의 행위가 범죄라는 것. 그것을 공적으로 인정받는 게 내 피해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했다. 강요된 망각 속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이 일을 마무리해야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피해자는 “억울했다. 나만 과거에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가해자에게 경고하지 않으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는 절박함을 느끼는 피해자도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자신이 고소하지 않고 있다가 다른 피해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안 뒤 고소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침묵하는 게 또 다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죄책감이 들었다. 늦었지만 내가 싸워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몇몇 피해자들은 수사·재판 절차가 그토록 힘들 줄 알았다면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강간을 당하고 다음날 바로 고소했다. 피해를 입었으니 고소한 것이다. 그때는 왜 다른 피해자들이 성폭력을 당해도 고소하지 않으려 하는지 몰랐다. 이렇게 힘들 줄 미리 알았다면 과연 같은 선택(고소)을 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직장 내 성폭력 피해자의 말이다.

■ 수사기관의 2차 가해

설문조사에서는 피해자가 고소 이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으면서 2차 가해를 당한 사례가 드러났다. 수사기관이 별다른 근거 없이 가해자를 옹호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수사기관으로부터 ‘피해자가 사회생활을 많이 안 해봐서 남자를 잘 모른다’는 지적을 받아 충격을 받은 피해자도 있었다. 이 피해자는 불이익을 받을까봐 항의하지는 못했다고 했다.

또 다른 피해자는 성폭력 피해를 신고했는데 수사기관으로부터 되레 무고죄도 함께 검토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조사 도중 경찰관이 내게 책임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요새는 무고도 많다’면서 ‘성폭력 사건 접수를 하면 무고 가능성도 같이 검토하고 있다’라고 했다. 나를 믿지 않는 수사관 앞에 있다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내 모든 말을 믿어달라는 건 아니지만, 처음부터 무고를 염두에 두고 조사를 하겠다는 수사관 앞에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피해자가 얼마나 될까. 성폭력 자체도 너무 힘든데 그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간 경찰서에서도 이런 취급을 받으니 미칠 것 같았다.” 대검찰청·한국여성정책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2017~2018년 기준 성폭력 무고죄로 기소된 인원은 성폭력 범죄로 기소된 인원의 0.78%에 불과하다.

수사기관이 피해자에게 진술 조사를 넘어 피해 재연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한 피해자는 “강간 피해를 입고 즉시 신고를 했는데 경찰이 물증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였는지 피해 장소로 직접 가서 재연을 해보자고 했다”며 “거부했더니 물증 없이 진술만으로는 불리해진다며 압박을 해서 기소 처분이 내려질 때까지 너무 불안했다”고 했다.

지난해 국가인권위원회는 수사기관의 성폭력 피해 재연 요구는 인권침해라고 판단했다. 그 밖에 조사 때 신뢰관계인의 동석 제한, 조서에 피해자 신원보호를 위한 가명 사용 불허, 대질 조사 종용, 개인정보 유출 등이 수사기관이 피해자 보호와 지원을 제대로 하지 않은 사례로 꼽혔다.

디지털 성폭력 신고 땐 사진 등 증거 요구도

■ 피해 재생산되는 디지털 성폭력

디지털 성폭력의 경우 영상·사진이 온라인상에서 한번 유포되면 피해가 끊임없이 재생산되기 때문에 피해자가 신고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피해는 심각하지만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수사기관의 이해도가 떨어지고, 증거 수집과 가해자 추적의 책임을 피해자에게 맡기는 사례도 있다.

한 피해자는 “지인능욕이라는 형태로 합성을 당해 경찰서에 갔더니 찾을 수 없다고 돌려보내서 포기하고 왔다”고 했다. 다른 피해자는 “트위터를 하는 친구에게 내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돌아다닌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라 경찰서에 갔다”며 “그런데 경찰이 그 자리에서 ‘요새 이런 사건이 많은데, 트위터는 잡기 어렵다. 가해자를 알아오든지 해라’라며 일단 자료만 두고 가라고 했다”고 답변했다. 이 피해자는 “수사를 안 하는 경찰은 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피해자에게 가해자 잡는 것까지 다 알아서 하라는 것인데 어쩌라는 건지. 문제제기 방법을 모르는 피해자들도 많은데 잘 모르면 앉아서 당한다”고 했다.

2008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성폭력 범죄는 실제 사건의 12.5%만이 공식 범죄통계에 기록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피해자의 87.5%는 피해를 입고도 신고·고소하지 않는 것이다.

이혜리·유설희·허진무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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