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꿈이 이뤄질 때까지.. 난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데"

최보식 선임기자 2020. 4. 27.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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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이 만난 사람] 또 낙선한 '영원한 재야'.. 장기표 선생
"나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 고향 위해 일한 게 없는데 이 나이에 票를 달라고 하면..
오랜 민주화운동으로 고생한 고향 사람 장기표를 돕자는 이들의 성원에 따뜻한 情 느껴"

지난 주말 저녁, 경남 김해에서 막 올라온 ‘영원한 재야’ 장기표(75)씨와 술잔을 나눴다.

그는 또 떨어졌다. 총선 전적만 7전 7패가 됐다. 그전까지 군소 정당이나 신생 정당, 혹은 자신이 만든 정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이번에는 처음으로 거대 정당 후보로 나와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미래통합당 공천 작업의 막바지에 김해을(乙) 공천을 받았더군요. 그 도시와 무슨 연고가 있습니까?

"내 고향이죠.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고향 출마는 생각해본 적 없었어요. 그전까지 선거에서 떨어져도 다 서울에서 떨어졌지요."

―다들 연고(緣故)를 찾아가는데, 왜 고향 출마를 피했습니까?

"한창나이에는 지역주의를 깨야 한다는 마음이 있었고…, 저도 창피함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동안 고향을 위해 일한 게 없는데 이 나이에 고향으로 가서 표 달라고 돌아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 않습니까."

41년간 미뤄온 신혼여행

―그렇게 느끼면서 왜 김해에 공천 신청을 했습니까?

"저는 미래통합당에 공천 신청을 하지도 않았어요. 제가 나서서 그렇게 하기에는 염치없는 짓이니까요. 공천 작업 막바지인 3월 중순쯤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험지인 김해에 출마해달라'고 했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릴 하신다'며 한마디 하고 끊었어요."

―공천 준다는데 왜 그런 단호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출마할 수 있으면 저 같은 사람은 서울에서 해야지요. 처음으로 털어놓는데, '장기표가 이 나이 되도록 국회의원 한 번 못 했으니 비례대표나 당선될 만한 서울 지역구를 누군가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하는 속마음이 있었지요."

장기표씨는 “과거에는 보수가 기득권, 지금은 민주당이 더 형편없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말했다.

―보수정당에서 선생 같은 분이 좌파운동권 세력의 공세를 막아줄 역할을 할 수 있지요. 미래통합당이 왜 이런 전략적 판단을 못 했는지 안타깝군요.

"정치판은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신경 안 씁니다. 나를 당내 경쟁자로 봤을 수 있고, 어쩌면 내게 어디에 출마하라고 말을 하기도 어려웠을 겁니다."

―김해을은 어떻게 수락했습니까?

"김형오 위원장이 전화한 지 두 시간쯤 지나 다시 전화해 '김해 험지에서 싸워줄 적당한 인물이 없다'며 설득했어요. 이번에는 예의상 매정하게 끊지 못하고 '생각은 해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공관위원인 P의원이 저를 설득했어요. 그리고 얼마 안 돼 '공천 명단을 곧 발표하니 승낙해달라'고 했어요. 이렇게 갈 수밖에 없구나 싶어 받아들였어요."

―당초 선생은 사회단체 대표 자격으로 '국민통합신당 창당준비위'에 참여했다가, 공천관리위원회 구성 문제로 갈등을 빚었지요?

"자유한국당에서 이미 꾸려놓은 '김형오 공천관리위'를 통합신당에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김형오는 자기 당에 대해 '존재 자체가 민폐'라고 말하던 김세연 의원을 넣는 등 독단적으로 공관위를 구성했어요. 제가 '김형오에게 모든 권한을 줘 공천 잘못으로 참패하면 그때 가서 한탄한들 뭐 하느냐'라고 했습니다. 결국 제 말이 맞았잖아요."

―김형오 위원장은 소신을 갖고 했다고 하지만, 납득 안 되는 공천이 꽤 있었어요. 총선 패배에 공천 실패도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결국 김형오가 중간에 사퇴했는데, 자기 사람들을 심고 '먹튀'한 모습과 비슷하잖아요. 위성 비례정당인 미래한국당 대표와 공관위원장도 중간에 그만뒀고, 이미 정해놓은 공천 후보까지 바꾸고…, 선거일이 가까이 오는데도 선거대책위도 제때 출범 못 시켰잖아요. 지구당에 당 공약집도 안 내려왔습니다. 선거 앞두고 이렇게 하는 정당이 과연 공당(公黨)입니까."

―그런 경위야 어떠했든 선생은 당 공천심사를 안 거치고 공천받은 특별 케이스인데?

"김해에 내려와 있으니, 당 사무국에서 '공천 심사 서류는 갖춰야 한다'고 했어요. 공천 서류는 분량이 많고 기입할 게 많아요. 내 사무실 직원이 대략 적어낸 것 같습니다. 공천이 너무 촉박하게 준비 없이 이뤄져 선관위에 마감 날까지 후보 등록을 못 맞출 뻔했어요. 후보 등록 서류에는 범죄 이력 증명서도 첨부해야 하는데, 경찰서에서 이런 서류를 발급받으려면 이틀이 걸립니다. 날짜에 쫓겼어요. 알다시피 제가 시국 전과가 많잖아요."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1971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 사건(1977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년), 5·3 인천 사태(1986년), 중부지역당 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1976년 서울 왕십리 중앙시장에 있는 다방에서 차(茶) 두 잔을 놓고 결혼했던 사람이다. 그가 쓴 책에는 '부부가 잘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것이다. 오래도록 행복했던 시간으로 간직할 수 있을 만한 오붓한 추억거리를 만들어둬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러면서 결혼 41년 만에 처음 부부 동반으로 강원도에 2박 3일 여행 간 얘기를 적었다. 이를 '41년간 미뤄온 신혼여행'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이렇게 천진난만한 구석이 있다.

―또 선거에 출마한다니까 부인의 반응은요?

"다 늙어 또 한다니 엄청나게 반대하지요."

―이번에는 거대 정당의 공천을 받았으니 당선 확률이 높다고 설득하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출마할 때마다 설득해봤지만 효력이 없어진 지 오래됐습니다. 설득하겠다는 걸 단념했어요. 혼자 김해로 내려왔습니다."

―부인께서 선거운동을 안 도왔습니까?

"정식 선거운동 기간에는 내려왔어요. 나이 들어 이렇게 한다는 게 다 창피하지요. 제 스스로도 민망한데, 박지원씨 같은 경우에는 국회의원을 계속 해왔으니까 좀 덜 하겠지만."

본 투표에서 106표 졌는데

―역시 생물학적 나이라는 게 핸디캡이 되지요?

"내 선거운동을 도와줄 운동원들이 처음에는 '우리 후보님 나이가 너무 많아 걱정'이라고들 했어요. 하지만 며칠 같이 현장에 다니고 나서는 그런 말은 쑥 들어갔어요."

―김해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향이고 여당 텃밭인데, 내려가니 주민들이 선생을 알아보던가요?

"여당 후보가 이전 선거에서 득표율 60%대 이상으로 이겼던 지역구입니다. 소위 '노무현 타운'입니다. 행정 조직 말단까지 여당이 다 장악하고 있어요. 작년에 최 선생의 인터뷰로 지식인들에게는 내가 많이 알려졌지만, 김해에 내려오니 특히 젊은 사람들은 나를 몰라요. 나에 대해 좀 아는 주민들은 '장 선생님 같은 분이 왜 기호 2번으로 나왔나?'라고 물어요."

―선생이 주사파 운동권과 민노총·전교조 등에 맞서 싸워온 사실을 잘 몰라서 그랬겠군요. 어떻게 답변했습니까? “이런 질문에 솔직하게 ‘내 정치적 뜻을 이루려면 국회의원이 돼야 하는데 그동안 독자적으로 아무리 주장해도 사람과 돈이 안 붙었다. 그래서 양당 중 하나를 선택했다. 과거에는 보수가 기득권인데, 지금은 민주당이 더 형편없는 기득권 세력이고, 나라를 망치는 주사파 운동권에 의해 장악돼 있다’고 했어요.” ―거대 정당의 후보로서 선거운동을 해보니 과거와는 확실히 다르지요? “그전까지는 총선에 출마해도 국가 정책을 공약했지, 지역 발전 공약이라는 걸 해본 적 없었어요. 선거가 한 달도 안 남은 시점에 내려와 선거공보물을 만들기도 빠듯했어요. 실제로 김해의 지리(地理)도 잘 몰라요. 코로나 사태로 장사가 안 되는 상가를 돌며 후보입네 인사를 하는 게 미안했어요. 문재인 정권의 실정(失政)을 전혀 부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요.” ―정권 중간에 치르는 선거는 정권 심판 성격인데, 코로나 사태로 전혀 다른 차원의 선거가 됐지요? “코로나 대응이 세계적으로 평가받자 오히려 문재인 정부의 큰 성과가 됐어요. 서민들은 경제적으로 절박한데, 통합당은 재난 지원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비쳤어요. 그런 점이 투표에 크게 작용했을 겁니다. 젊은 직장인이나 지식인들은 정부 여당이 싫어도, 수구 꼴통 꼰대의 이미지가 있는 통합당은 차마 찍지 못했을 겁니다.” ―결국 1만1000표 이상 차이로 떨어졌는데? “본 투표 개표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4만481표 대 4만375표였어요. 106표(0.13%) 졌어요. 그런데 사전투표 개표에서 여당 표가 막 쏟아졌어요. 3만1153표 대 1만9628표로 무려 22.7% 차이나 났어요.” ―어떻게 그런일이…. 이게 선거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한낱 특이 현상인지, 일각에서 제기하는 사전투표 조작 의혹과 관련된 것인지 밝혀져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어쨌든 이번 선거에서 무슨 기억이 가장 남습니까? “나에 대한 연민 때문인지…,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민주화운동으로 고생한 고향 사람 장기표를 돕자’며 열렬하게 성원해줬습니다. 그런 따뜻한 정을 느끼면서 내가 김해 출마를 참 잘했구나 싶었어요. 일면식도 없는 타지 분이 내려와 ‘장기표 선생이 꼭 당선돼야 한다’며 열정적으로 도와줬고요. 선거 전날에는 제 둘째 딸이 지원 유세를 했습니다. 아버지로서 해준 게 없었는데 듣고 있으니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유튜브에서 딸의 지원 유세 영상을 찾아봤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일생 동안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도망 생활·고문을 당하고도 10억원가량 민주화보상금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 보상금은 일반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민주화운동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정치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신념과 원칙이 낯설지 모릅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무분별한 공공기관이 세금을 축낸다고 공공기관 이사장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술잔을 놓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출마할 일이 안 올 수 있겠지만, 정치로써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내 꿈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꿈이 이뤄질 때까지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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