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노무현의 한·미 FTA 같은 대반전은 없는가

고현곤 입력 2020. 4. 28. 00:38 수정 2020. 4. 28.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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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진영논리 뚫고 국익 위해 강행
문, 소주성으론 위기 극복 힘들어
시장친화 정책으로 새 출발해야
통합의 지도자로 기억될 기회
고현곤 논설실장

노무현 대통령은 의외성이 강했다. 국민을 종종 놀라게 했다. 불안했지만, 그게 인간적인 매력이기도 했다. 2006년 2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 선언은 의외성의 하이라이트였다. 그는 반(反)시장·반기업·반미 성향 진보세력의 압도적 지지로 당선됐다. 주변이 온통 진보였다. 그가 FTA를, 그것도 미국과 하겠다니 믿기지 않는 대반전이었다.

지지층이 순식간에 등을 돌렸다. 그해 3월 학계·노동계·영화계·농민 270개 단체가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노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들이었다. “제2의 을사늑약”(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미국의 51번째 주나 경제식민지로 전락할 것”(김성훈 전 농림장관)이라는 험한 말이 쏟아졌다. 양극화와 집값 급등으로 흔들리던 노 대통령의 지지율은 바닥을 뚫고 12%까지 추락했다.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추진하면 정치적으로 고립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엄청난 역풍을 각오하고 결단을 내렸다. 당시 그는 “한·미 FTA는 다음에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 할 것 같다. 국가 경제를 생각할 때 반드시 해야 한다. 정치적 손해를 무릅쓰고, 특단의 의지로 추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도 걱정이 많다.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생각하자”고 인간적 고뇌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미 FTA를 보수 정부에서 추진했으면 반발이 극심해 성공하기 어려웠다. 노 대통령이니까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를 갈등과 분열의 문제적 대통령이라고 하면서도, 한·미 FTA를 성사시킨 용기 있는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노무현 정부를 모태로 한 문재인 정부에서 살고 있다. 소득주도성장은 국민을 돕겠다는 따뜻한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근근이 먹고사는 취약계층의 소득을 늘려주자. 일자리 불안정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주자. 주 52시간 근무제로 저녁이 있는 삶을 찾아주자.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어느 정부, 어느 지도자라도 꿈꾸는 일이다.

그런데 세상이 그리 간단치 않다. 최저임금이 3년간 연평균 10% 넘게 오르자 취약계층인 알바생·식당 이모부터 일자리를 잃었다. 자영업자·소상공인은 인건비가 늘어 고통을 겪었다. 주 52시간제로 시간외수당 등 소득이 줄어든 근로자들은 투잡을 찾는다. 정부가 ‘착한 일 한다’며 순진하게 추진하다 일이 꼬인 것이다. 현장을 잘 모른 채 이념으로 밀어붙인 결과다. 준비 부족과 의욕 과잉이 사태를 키웠다. 소득주도성장은 ‘소득 증가→소비 증가→생산·투자 확대→성장→소득 증가’의 선순환을 가져오지 못했다. 실패를 덮으려다 재정만 바닥났다. 정부도 모를 리 없다. 부작용이 크다면 지금이라도 정책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한·미 FTA처럼 진영논리의 틀을 깨는 뭔가 필요하지 않을까.

유감스럽게도 정부가 그런 승부수를 던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선, 정부는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다른 길을 찾을 정도로 유연하지 않은 것 같다. 지지층의 반대를 돌파하는 노 대통령의 배짱과 신념,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 때 친시장 정책으로 변절하는 바람에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며 집권 후반기의 반면교사로 삼는 분위기라고 한다.

둘째, 소득주도성장을 포기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간의 경제 실정이 코로나 사태에 묻혔다. 3월 취업자가 1년 전보다 19만5000명 줄었다. 이 가운데 어느 정도가 코로나 때문이고, 소득주도성장 때문인지 구분하기는 어렵다. 모두 코로나 탓이라고 해도 딱히 반론이 어렵다.

셋째, 총선 승리로 여차하면 반대 목소리를 힘으로 누를 수 있게 됐다. 정부와 여당은 지지율이 급락하거나 선거에서 진 적이 없다. ‘국민이 잘한다며 표를 몰아줬는데, 뭐가 문제냐’는 정서가 깔려 있다. 실제로 21대 총선 당선자 가운데 범여권 응답자의 80%가 ‘소득주도성장을 강화 또는 유지해야 한다’고 답했다(한국경제신문).

하지만 코로나 탓으로 돌리고, 총선 승리를 만끽하며 넘어가기에는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 마이너스 성장이 현실이 됐다. 코로나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듯, 경제위기가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다. “대공황 이후 최악”(게오르기에바 IMF 총재),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쿠오모 뉴욕주지사) 등 우울한 전망이 넘쳐난다. 소득주도성장·탈원전 같은 실패한 정책과, 재정에서 돈 푸는 임시방편으로는 계속 버티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는 서민과 노동자를 보호하겠다는 이념으로 집권했다. 소득주도성장을 핵심 수단으로 여긴다. 총선에서 압승한 마당에 손대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문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마침 리셋이 필요한 시점에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그간의 실정은 코로나 탓으로 덮고, 규제 완화 등 시장친화 정책으로 새 출발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게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어 서민과 노동자를 진짜 보호하는 길이다. 문 대통령이 통합의 지도자로 기억될 기회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은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국익만 생각했다. 문 대통령에게 그런 대반전을 기대할 수는 없는가.

고현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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