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모자라 푸드뱅크 몰리는데..농작물 갈아엎는 '팬데믹의 미국'
[경향신문]
미국 오하이오주에서 요양보호사로 일하던 아쿠아나 퀄스(47)는 지난 21일(현지시간) 난생 처음 푸드뱅크를 찾았다. 3월 중순부터 코로나19로 일이 끊겼고, 한 달이 지나자 음식을 살 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라이트주립대학교 축구경기장 주차장에 임시로 세워진 드라이브 스루 ‘데이턴 푸드뱅크’ 에서 4시간을 기다려 식재료 꾸러미를 받았다. 퀄스 가족이 몇 주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퀄스가 난생 처음 푸드뱅크를 찾은 날 플로리다주에서 ‘R.C. 해이튼’ 농장을 운영하는 폴 앨런은 수백에이커에 달하는 양배추 밭을 갈아 엎기 시작했다. 그는 주로 KFC와 같은 대형 식당 체인에 양배추샐러드를 공급해왔다. 하지만 도시봉쇄로 식당들이 문을 닫았고, 농장의 양배추는 갈 곳을 잃고 밭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트렉터로 밭을 밀어버렸다.
도시에서는 먹거리를 구하지 못해 푸드뱅크를 찾는 사람들이 폭증했는데 농가에서는 농작물을 폐기하는 아이러니한 풍경이 미국에서 펼쳐지고 있다고 미 정치매체 폴리티코가 지난 26일 보도했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도 푸드뱅크 수요가 급증했다며 퀄스가 음식을 받아간 23일 하루에만 데이턴 푸드뱅크에서 1381가구가 식재료를 받아갔다고 전했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있기 전 이 푸드뱅크에서 음식을 받아가는 가정은 하루 200가구에 불과했다. 무려 6배 이상 수요가 늘어난 것이다.
푸드뱅크는 식품을 기탁받아 소외계층에 식품을 지원하는 서비스다. 그런데 코로나19로 도시가 봉쇄되고, 경제활동이 멈추자 중산층에서도 푸드뱅크를 찾기 시작했다고 타임은 설명했다. 미국에 당장 먹을 걸 살 돈조차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쉽사리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2019년 미국연방준비제도 조사에서 미국인 40%가 비상금으로 쓸 현금 400달러도 없다고 응답했다. 저축은커녕 모기지·오토론·신용카드 등 빚에 의존해 살아온 미국인들이 많았는데, 코로나19로 일자리를 잃고 생계까지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타임은 부연했다. 지난달 셋째주부터 지난주까지 5주간 미 노동부에 실업수당을 신청한 건수는 2645만명을 넘어섰다. 경제위기로 푸드뱅크에는 사람이 몰리는데 기부는 줄었고, 자원봉사자도 부족하다. 주로 은퇴한 지역민이 푸드뱅크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는데, 코로나19 감염 위험으로 그 수가 크게 준 것이다. 오하이오주에서는 군인들이 푸드뱅크 업무를 돕고 있다.
농촌의 상황도 암담하다. 호텔, 식당, 학교 등에 식재료를 납품하던 대규모 농장들의 판로는 대부분 막혔다. 미 농무부(USDA)가 190억달러에 달하는 농업원조 프로그램을 공개했지만 현장에서는 이미 늦었다는 반응이 쏟아지고 있다. 출하시기를 놓친 농작물들은 밭에서 썩어가는데 봉쇄정책 때문에 이를 수확해 포장할 인력도 부족하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양의 농작물을 보낼 곳도 없다. 앨런이 운영하는 농장 면적은 8000에이커(979만평)에 달한다. 서울 여의도(88만평) 면적의 11배가 넘는 규모다. USDA가 각 농장에서 25만달러 어치의 농작물을 사겠다는 방침을 내놨지만, 이는 앨런 농장에서 하루동안 출하되는 농작물을 사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양배추를 키우는데 1에이커당 4000달러가 들어가기 때문에 그로서는 당분간 농사에서 손을 떼는 게 나을 수 있다.
아예 무료로 농작물을 나누는 곳도 생겨났다. 아이다호주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라이언 크래니는 감자 수백만개를 팔 수 없게 되자 길거리에 무료로 내놨다. 700명이 사는 그의 마을에 수천명이 몰려왔다. 크래니는 “8시간을 운전해 온 사람도 있었다”면서 “정부가 농작물이 생산되고 출하되는 과정과 분배되는 시스템을 이해한다면 농업이 붕괴되는 현실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폴리티코에 말했다.
이윤정 기자 y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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