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실패한 정부 정책에 대한 책임, 누군가는 져야 한다

이석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2020. 5. 5.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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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

코로나19가 몰고 온 공포 속에서 전 세계는 치료제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 몇몇 약이 좋은 치료 효과를 보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지만 약효에 대한 여전한 논쟁 속에서 조건 까다로운 '임시 허가'를 얻어 조심스럽게 치료에 쓰고 있다. 생명이 달린 긴급한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치료 가능성이 있는 약을 사용하겠다는데 왜 이토록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치게 하는 것일까? 그 답은 치료 동기의 선량함과는 상관없이 치료 결과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병을 고치고자 정부가 처방하는 국가정책이 그 동기와는 상관없이 효과가 없거나 부작용을 일으킨다면 누군가는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효과 없는 정책을 놓고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코로나19의 사회·경제적 여파 속에서 목적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한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앞으로 누구도 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선진국 대부분은 최고 감사 기구(SAI· Supreme Audit Institution)로 하여금 정책 효과에 대한 정부의 책임성을 확보하도록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 실제로 영국, 미국, 이스라엘, 독일 등의 최고 감사 기구는 '정책 감사'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책 효과에 대한 책임성을 묻고 있다. 과거에는 복잡하고 불확실한 현실에서 정책 효과를 합리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에 대해 책임을 묻기가 부적절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의견은 21세기에 들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2000년, 2019년의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들이 정책 효과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방법론을 연구한 학자들일 정도로 정책 효과의 과학적 검증 기법은 근래에 들어 눈부신 학문적 발전을 이루었다.

오늘날 한 나라가 겪고 있는 거의 모든 정책 문제에 대해 검증된 해결책이 알려져 있고 이들의 효과를 뒷받침하는 객관적·과학적 증거가 이미 축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책 환경에서 실패하는 정책을 내놓는 것은 그런 해결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정책 결정자의 행위로 정책 실패가 발생한 것이며, 만약 정책 감사를 실시한다면 두 경우 모두 실패의 원인 행위와 관련한 사실관계를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책 결정자는 법적 책임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 때문에 정책이 실패했는지 명확히 확정하는 '인과적 책임(causal responsibility)'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인과적 책임은 우리나라의 탈원전 정책과 비슷한 사례에 대한 독일의 정책 감사에서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독일의 최고 감사 기구인 연방감사법원(FCA)은 2014년 연방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전환 정책을 감사하면서 이 정책이 연방정부 재정에 미치는 영향, 국민의 전기료 부담에 미치는 영향 등을 충분히 검증하지 않고 결정되었다고 결론짓고 정책을 입안·추진한 연방에너지경제부에 인과적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우리나라 감사원은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에 대한 감사를 수행했다. 조기 폐쇄 결정을 뒷받침하는 정책 증거들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가, 해외에 존재하는 상충하는 증거들을 고려했는가, 사회 각 분야 파급 효과에 대한 분석과 증거 조사가 이루어졌는가 등의 감사 기준을 수립하고 정책 결정자의 인과적 책임을 따지면 될 사안이다. 그러나 계속 감사 결과 발표가 미뤄지는 것으로 보아 이번에도 '정책 감사'가 아니라 과거 해외 자원 개발 감사나 4대강 감사 때와 같이 '정치적 감사'로 흐르게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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