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택트'시대의 과부하..또 스러진 택배기사

이효상 기자 2020. 5. 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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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ㆍ광주 CJ대한통운서 일하던 40대 노동자 ‘과로 추정’ 돌연사
ㆍ하루 15시간 월 배송 1만개 ‘살인적 물량’…정부대책 헛돌아

“가족들이랑 제주도 가서 좀 쉬고 오려고.”

택배기사 정모씨(42)는 토요일이던 지난 2일 배송을 나가기 전 동료에게 다음주 가족여행 계획을 알렸다. 코로나19 여파로 급증한 물량에 정씨는 지난 몇달간 제대로 쉬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모처럼의 가족여행은 출발 당일 아침 정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물거품이 됐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물리적 거리 두기’로 인해 생겨난 사회 곳곳의 빈 공간을 과로 노동으로 메우던 택배노동자가 숨졌다. 지난 3월 배송 중 허혈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쿠팡맨’에 이어 배송노동자가 또 쓰러진 것이다. 코로나19발 물량 급증에 정부가 택배노동자 보호대책을 내놨으나 현장에서는 무용했다.

6일 전국택배노조 등에 따르면 CJ대한통운 광주광역시 장수터미널에서 근무하던 택배기사 정씨는 지난 4일 새벽 자택에서 외마디 비명을 지른 뒤 의식을 잃었다. 직후 정씨는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사망했다. 심정지로 인한 돌연사였다.

동료와 유족은 별다른 지병이 없었던 정씨의 과로사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각종 배송 주문이 폭증하면서 정씨가 맡은 구역의 배달 물량도 크게 늘었다. 배송 기록을 보면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한 지난 2월에만 정씨는 택배물 9960개를 배송했다. 코로나19 사태 이전 숙련 택배노동자가 한 달에 7000~8000개를 배송한 점을 감안하면 크게 늘어난 양이다. 10년차 택배기사인 정씨는 거리 두기가 본격화된 3월 1만1330개, 4월에는 1만288개를 배달했다. 노동시간 역시 크게 늘었다. 주변 동료와 유족은 정씨가 오전 6시쯤 출근해 오후 9시에나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고 증언했다. 이렇다할 휴식시간도 없이 하루 15시간 동안 무거운 상자를 나른 것이다.

정씨와 같은 터미널에서 일했던 동료 박재균씨(47)는 “1만개를 넘긴다는 건 말이 안된다. 1만개는 살인적인 물량”이라고 말했다. 6년차 택배노동자인 박씨 역시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물량 폭증으로 지난 3월 물량 8600개를 소화했다. 8600개는 박씨의 월 배송물량 최고기록이다. 그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저만 해도 코로나로 인해 물량이 15~20%가량 늘었다”며 “코로나 때문에 ‘문앞 배송’을 원하는 고객들이 많아 휴식시간도 없고 퇴근시간은 더 늦어졌다”고 말했다.

앞서 ‘쿠팡맨’이 배송 도중 사망하는 등 거리 두기로 인한 배송물량 급증이 예견됐음에도 불구하고, 배송노동자 건강권 보호조치는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국토교통부가 지난달 10일 택배업계와 간담회를 열고 택배기사 충원, 적정 근무체계 마련, 휴게시간 보장 등의 내용이 담긴 권고사항을 내놨지만 현장 노동자는 이를 체감하지 못했다.

김인봉 전국택배노조 사무처장은 “쉬는 시간을 가지라는데, 내 몫의 물량을 어떻게든 다 배송하려면 쉬고 싶어도 쉴 수가 없다”고 했다. 정씨가 일했던 현장에서도 인원 충원이나 영업소 단위 건강관리자 지정 등 정부 권고사항은 시행되지 않았다. 노조는 회사가 택배 분류작업 전담인력을 채용해 택배노동자의 노동시간을 근본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택배노동자들이 새벽에 출근해 정오 무렵까지 택배물을 분류하는 작업을 진행한 뒤 오후에야 배송을 시작한다. 월급이 아니라 건당 수수료를 받아 ‘개인사업자’로 취급되는 택배노동자들은 택배물 분류 작업이 대가 없는 ‘공짜 노동’이라는 입장이다.

CJ대한통운은 “택배 종사자 충원 등 국토부 권고사항은 현장 상황에 따라 추진 중이며, 집배점별 건강관리자 지정은 5월 말까지 완료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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