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아베의 영속패전

박민희 2020. 5. 7.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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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4일 긴급사태를 31일까지 연장한다고 발표하는 모습이 전광판에 비치는 가운데, 도쿄 거리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쓴 채 걷고 있다. 도쿄/교도 AP 연합뉴스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는 <영속패전론>에서 일본이 패전을 부정함으로써 영원한 패전을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의 기지가 되어 철저하게 굴종하는 대신 식민 지배와 침략을 당한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이웃 국가들에 대한 사죄와 책임은 회피했다. 천황과 지도부가 침략전쟁의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만들어진 ‘무책임의 체계’와 대미 종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속패전(永續敗戰)의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라이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일본 정부가 보인 무책임한 행태의 기원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썼지만, 지금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아베 정부에서도 같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아베 정부는 납득할 수 없는 소극적 검사로 감염 확산을 사실상 방치했다는 비판과 ‘아베노마스크’ 불량 파문 등 총체적 방역 실패 논란에 휩싸여 있다. 그러면서도 아베 정부는 “한국처럼 검사하면 의료 붕괴가 온다”, “한국의 드라이브스루 검사는 정확도가 낮다”고 주장하며 한국의 방역 모델을 무시하는 데 힘을 쏟았다. 아베 총리는 지난달 29일 처음으로 “한국과 코로나 감염증 대응에 협력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 협력을 요청하는 것은 꺼리고 있다.

이에 대해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는 “아베 정권의 핵심 지지층은 혐한·혐중적인 사람들이라 한국과 중국을 배우는 걸 굴욕이라 여긴다”며 “이 때문에 정부는 일본의 독자적인 감염 방지책을 실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꾸미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고 했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반추하는 힘과 미래를 예견하는 상상력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일본은 눈앞의 위기 모면에 급급해 ‘원숭이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코로나 위기로 잠시 미뤄져 있지만, 한일 사이에는 강제동원 피해 배상과 수출규제 철회라는 과제가 있다. 2018년 11월 일본 전범 기업들이 강제동원 피해 노동자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 이후, 아베 정부는 한국이 ‘국제법(한일청구권협정)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보복성 수출규제를 강행했다. 일본 기업들이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는 것을 막은 아베 정부는 피해자들이 압류한 일본 기업 자산을 현금화(매각)하면 한국에 더욱 심각한 보복을 하겠다고 위협해왔다. 아베 정부는 과거사 책임을 회피하려고 ‘혐한’의 깃발을 이용해 지지층을 결집했고, 코로나 위기에서도 한국의 방역 성과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이제 한국의 4·15 총선과 아베 정부의 코로나 대응 실패에 따른 일본 민심의 변화가 새 국면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번 총선의 민심은 ‘친일’을 단호하게 심판했다. 대표적 친일 정치인으로 꼽힌 나경원 의원을 낙선시켰고, 양승태 대법원의 강제동원 판결 지연에 문제를 제기했던 이수진 판사, 위안부 피해 문제 해결을 상징하는 윤미향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등을 당선시켰다. 아베 정부는 수출규제를 통해 문재인 정부를 굴복시키려 했고, 한국 내에서 일본과 적당히 타협하라는 목소리가 친일 언론과 정치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확산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한국 시민들은 총선을 통해 이를 거부하고, 원칙에 입각한 한일 외교를 분명하게 주문했다.

일본에서는 코로나 대응 실패로 아베 정부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의료·검사에 불안을 느낀다는 답변이 68%에 이른다. 아베 정부의 ‘공기’(눈치)를 읽으며 한국을 무시하던 언론들도 이제는 “한국의 대책은 인공지능(AI), 일본의 대책은 아날로그” “한국에 머리를 숙여서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해야 할 정도로 대책을 배워야 한다”고 보도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미-일 동맹으로 G2 시대를 헤쳐가려 했던 아베의 전략도 수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한반도와의 관계 조정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일본 외교의 과제로 부상할 것”이라고 남기정 서울대 교수는 전망한다. 한국에는 “대일 외교에서 사라졌던 공간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미-중 신냉전의 파도가 밀어닥치는 지금 한일의 협력과 공조 필요성은 커지고 있다. 정부는 일본에 역사·영토 문제는 단호하게 대응하되 경제·사회·문화 등의 협력은 강화하는 그동안의 ‘투트랙 원칙’을 살리면서, 새로운 환경을 살피며 외교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지방정부와 민간을 통한 협력도 모색해볼 만하다. ‘아베 이후’까지 염두에 두고 한일 민간의 이해와 협력은 확대되어야 한다.

아베 정부는 수출규제를 철회하고 70년 넘게 기다려온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사과와 배상으로 과거의 책임과 직면하는 것이, 일본이 영속패전에서 벗어나는 출발점임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의 방역 성과를 겸허하게 인정하고 손을 내미는 것은 출발신호가 될 수 있다.

박민희 ㅣ 논설위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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