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뉴스1

"리어카에 시체 실려가는 모습 보니 피가 거꾸로 솟더라고.."

허단비 기자 입력 2020. 05. 11. 07:30 수정 2020. 05. 11. 09:41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5·18 40주년을 말하다]⑨교련복 입고 총 든 고교생 김재귀씨

[편집자주]1980년 5월 한반도 서남권의 중심도시인 광주에서는 한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다. 5·18 40주년을 맞아 40년 전 당시 현장을 지켜낸 이들을 통해 그날의 참상을 되돌아본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김재귀씨(57)가 지난 8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5·18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0.5.10/뉴스1 © News1 한산 기자

(광주=뉴스1) 허단비 기자 = "리어카에 시체가 실려 나가는 것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아 견딜 수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 이름을 부르며 집에 가자는 어머니께 '엄니, 나 여기서 그냥 죽을라요'라며 끝까지 버텼죠."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김재귀씨(57). 계엄군의 총에 맞은 오른손을 연신 주무르며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갔다.

김씨는 80년 5·18 당시 교련복을 입고 총을 든 소년 시민군이었다. 광주 동일실업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 5·18을 접했다.

김씨는 지난 8일 뉴스1과 만나 40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김씨가 시민군에 합류한 계기는 처음엔 호기심이 컸다고 했다.

"5월19일에 휴교령이 내려져 아버지가 저를 밖에 못 나가게 하셨어요. 당시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돼 학생들을 다치게 하고 팬티바람의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공수부대가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팬다'는 말에 직접 나서서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20일쯤 마을 앞으로 버스 한 대가 지나가기에 무작정 탔다. 그날 하루 종일 시내에서 시위대와 함께 시위에 참여했다. MBC와 KBS가 불타는 모습도 지켜 봤다.

다음날인 21일 오전 우연히 버스터미널 앞에서 시신 2구를 리어카로 싣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직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요. 시민들이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지나가는데 정말 피가 거꾸로 솟았어요. '아, 정말 내가 비록 어리고 아무것도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구나'라는 생각에 시민군에 참여하게 됐죠."

5·18기록을 보면 이 장면은 80년 5월21일 상황이다. 전날 밤 광주역 앞에서 계엄군의 첫 집단발포로 5명이 숨졌다. 김재화(25), 김만두(44), 김재수(25), 이북일(28), 허봉(25) 등이다. 이 시신 2구는 김재화씨와 허봉씨로 추정된다.

시민들은 21일 오전 광주역 근처에서 숨져있는 2구의 시신을 발견해 손수레에 실은 뒤 태극기를 덮고 공용버스터미널을 지나 시내 중심부 금남로까지 이동했다.

희생자 시신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시위 대열에 합류했다. 그들 속에 김씨도 포함돼 있었다.

21일은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있던 날이기도 하다.

김씨는 계엄군이 집단발포를 하자 시민들과 함께 차를 타고 전남 나주 금성지서(파출소)로 향했다. 무장하기 위해서다.

"계엄군 헬기가 계속 시민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녔고 마음이 급했죠. 무기고 자물쇠를 부수고 카빈소총과 총탄 등을 챙겨 광주공원으로 이동해 시민들에게 무기를 나눠줬어요."

그때부터 김씨는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그는 26일 시민군 기동타격대에 합류하기 전까지 시민들의 보안과 치안 유지를 위한 팀에서 주로 경계근무 활동을 펼쳤다.

5월22일은 전남도청 2층에서, 24일은 농성동 자신의 초등학교 교감의 주택 2층에서 경계 근무를 섰다.

25일에는 도청 앞에서 투구를 쓰고 경계 근무를 서고 있는 그를 만나려고 어머니가 옷가지를 들고 버선발로 찾아왔다.

"그때 어머니가 '재귀야, 재귀야' 하시면서 집으로 가자고 그러셨는데 나는 공수부대의 잔인함을 이미 봐버려서 피가 거꾸로 솟아 도저히 갈 수가 없었어요. 내가 자식으로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어머니 나 여기서 죽을라요, 진짜 나 여기서 죽을라요'라고 했죠."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김재귀씨(57)가 지난 8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5·18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다. 2020.5.10/뉴스1 © News1 한산 기자

김씨는 경찰 출신의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에 부모의 말을 거역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시민군에 합류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반항이었다.

"다섯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나 형과 싸우면 동생인데 대들었다고, 동생과 싸우면 형답지 못하다고 아버지께 맞으며 자랐으니까요. 아버지가 아셨다면 거리로 뛰쳐나오지 못했겠죠. 그래서 아버지 몰래 집에서 나온 거죠."

치안유지팀에서 활동을 하던 김씨는 계엄군의 총칼에 쓰러져가는 시민들과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광주시민들을 보며 '이건 정말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직접 시민군에 들어가야 한다는 열망이 강해졌다고 한다.

그는 26일 오후 3시쯤 시민군 기동타격대를 추가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했다.

하지만 시민군 지도부는 작은 키에 앳된 얼굴, 총자루 한 번 잡아보지 않은 어린 학생을 기동타격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사실 작은 키가 문제였다기보다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이 남은 소년을 뽑기가 쉽지 않았던 탓이 컸다. 하지만 김씨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 우리 부대장이 이재호씨였어요. 내가 아저씨한테 '아저씨 나 죽을라요. 나 죽을 각오로 왔소. 안 들여 보내주면 나 절대 안 갈라요' 하니 어쩔 수 없이 받아줘 결국 기동타격대 마지막 추가 인원으로 들어가게 됐죠."

기동타격대에 합류할 때 그는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음을 불사한 17살 소년에게 무장 계엄군은 대수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 몰래 집을 나온 후로 시민들이 가져다주는 주먹밥과 수돗물을 받아먹으며 일주일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김씨는 "어머니들이 길거리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먹여주고 나눠줬고 바가지에 물을 퍼다 주며 '우리 아들들이 고생한다, 고생해' 하던 그 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뜬눈으로 밤을 새운 지 일주일이 되자 쏟아지는 잠을 참을 수 없었다고 한다.

27일 도청에서 최후의 항전, 마지막 항쟁이 있던 날. 김씨는 도청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 정차한 트럭에서 무장한 채 잠이 든 후 기억을 잃었다.

그는 '시체처럼' 잠이 들어 쏟아지는 총탄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했다.

날이 밝고 누군가 일어나라며 발로 그를 차자 대원들에게 어서 나가자며 일어나 손을 흔들다 계엄군의 총에 손을 맞았다. 머리를 숙이니 계엄군은 다시 오른손을 저격했다.

김재귀씨는 40년 전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손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깐 잠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을 만지며 "겨울만 되면 여기가 시큰시큰하고 손 전체가 마비된다. 아침에 해 밝기 전에는 정말 죽는다. 이 오른손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 도청 앞에서 계엄군에게 붙잡혀 단기 3년, 장기 5년 형을 받았다. 이후 교도소로 넘어간 후 형집행면제로 풀려났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 김재귀씨(57)가 지난 8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문화센터에서 5·18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2020.5.10/뉴스1 © News1 한산 기자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을 때는 목사의 도움으로 집에 편지를 보내 생사를 알릴 수 있었다. 병원에 찾아온 부모는 병원 밖 먼발치서 살아있는 아들의 모습만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그는 "생사도 확인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는데 그마저도 감사했다. 병원 먼발치에서 부모님이 내가 살아있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가시는데 정말 눈물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김씨의 어머니 이점례씨는 지난 2018년 작고했다. 이씨는 80년에는 17살의 넷째 아들을 말리지 못하고 도청에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고 항쟁 이후에는 병원 밖에서 아들의 생사만 확인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김씨 어머니는 80년 이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항상 아들과 함께 했다고 한다. 국회로, 청와대로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위해 어디든 함께 다니며 5·18단체 활동을 했고 5·18부상자회 '왕언니'로 불렸다.

김씨는 "5·18은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 주먹밥을 나눠준 어머님들과 시민군을 도와준 모든 광주시민의 이야기이다. 내가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을 폄훼하는 가짜뉴스를 뿌리뽑게 만들 법을 만들고 더 이상의 역사 왜곡이 없도록 하는 것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beyondb@news1.kr

Copyright ⓒ 뉴스1코리아 www.news1.kr 무단복제 및 전재 – 재배포금지

포토&TV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