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주 이름은 '양만춘'이 아니다.

임기환 입력 2020. 5. 14.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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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 명장면-96] 645년 9월 18일이었다. 중국 측 기록은 안시성 전투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안시성 아래에서 (당군) 병사들이 시위하면서 선회하였다. (안시)성 안에서는 모두가 흔적을 감추고 나오지 않다가 성주가 성에 올라가서 절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100필을 하사하면서 자기 임금을 섬긴 것을 격려하였다. 그리고 이세적, 강하왕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거느리고 후위를 맡게 하였다."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8 )

누구도 이루지 못한 천하 제패의 야망을 품고 요하를 건넜던 당 태종은 끝내 안시성 앞에서 그 야망을 거두고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당의 사관들은 마지막까지 당 태종을 주인공으로 만들기에 바빴다.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적장이지만, 그 충정을 치하할 줄 아는 아량을 갖춘 당 태종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안시성주 역시 깃발을 내리고 당 태종에 대해 절을 하며 경의를 표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중국 사서의 이 대목을 읽는 우리들은 당 태종보다도 안시성주의 의연한 태도에 감동을 받게 된다. 중원 땅을 진동시킨 당 태종의 명성도, 그와 함께 중원을 통일하고 북방의 돌궐과 서역을 제압한 이세적을 비롯한 숱한 맹장들도 모두 안시성 앞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그러기에 이 땅의 후대인들은 이 안시성주가 누구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역사서에는 단지 '안시성주'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부터 조선 지식인들은 안시성주의 이름이 양만춘(梁萬春)이라고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역사서에 전하지 않은 그 이름이 갑자기 어떻게 조선에 알려지기 시작했을까?

조선의 기록 가운데 안시성주로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전하는 문헌은 송준길(宋浚吉·1606~1672)의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으로 그동안 알려져 있었다. 근래에 정호섭 고려대 교수가 양만춘이란 이름이 조선에 알려지게 된 내력과 문헌을 추적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기록한 문헌은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월정만필(月汀漫筆)'이다. 사실 '동춘당선생별집(同春堂先生別集)'에서 송준길도 윤근수가 중국 조정에서 듣고 온 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윤근수가 양만춘이란 이름을 언급한 첫 인물쯤에 해당되는 점은 분명해 보이는데, 다만 '월정만필'의 저작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내용을 통해 1594년 이후 어느 시기에 저작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월정만필'에서 양만춘이란 이름을 거론하는 대목은 다음과 같다.

안시성주가 당 태종의 정예 군대에 항거하여 마침내 외로운 성을 보전하였으니, 그 공적이 위대하다. 그런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서적이 드물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고구려 때의 역사서가 없어서 그런 것인가? 임진왜란 뒤에 중국의 장수로 우리나라에 원병 나온 오종도(吳宗道)란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안시성주의 성명은 양만춘(梁萬春)이다. '당태종동정기(東征記)'에서 보았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감사 이시발(李時發)을 만났더니, "'당서연의(唐書衍義)'를 보았더니 안시성주는 양만춘이었으며, 또 안시성을 지킨 장수가 두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 ('월정만필')

위의 기록에 따르면 윤근수는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라는 이야기를 두 사람에게 듣는다. 그중 명나라 사람 오종도는 당태종 동정기를 보고 이야기한 것이고, 감사 이시발은 '당서연의'를 보았는데, 더구나 그 책에는 장수가 2인이었다는 내용도 쓰여 있었던 것이다. 태종 동정기와 '당서연의'는 같은 책일 가능성이 높은데, 바로 '당서지전통속연의(唐書志傳通俗演儀)'임이 거의 분명하다고 본다.

당서지전통속연의 /사진=바이두
'당서지전통속연의'는 명나라 때 웅대목(熊大木)이 지은 연의식 소설이었다. 웅대목의 생몰년은 정확하게 알 수 없는데, 16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통속 소설가였다. '당서지전통속연의'는 전체 8권으로 구성되었고, 그 가운데에 7권과 8권의 내용이 대체로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을 다루고 있으며, 8권에 안시성 전투가 서술되어 있다.

이 책에는 양만춘이 절노부(絕奴部) 출신이라고 하였고, 그와 더불어 장수 5명의 성명까지 나열되어 있다. 같은 절노부 출신인 부하 장수 추정국(鄒定國)과 이좌승(李佐升), 관노부(灌奴部) 출신인 장수 구비(歐飛)와 부하 장수 기무(暨武), 장후손(張猴孫) 등이다. 앞서 이시발이 안시성을 지킨 장수가 두 사람이었다고 언급한 것은 바로 양만춘과 구비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런데 구비 등은 안시성 밖에서 싸우다 전사하였으며, 끝까지 안시성을 지킨 장수는 양만춘이다. 게다가 이 책에는 당시 건안성을 지키던 장수인 노한이(盧漢二) 등 4명의 장수 이름도 나와 있다.

이렇게 양만춘 이외에 다른 장수들의 이름까지 자세히 소개하냐면, 나머지 인물이 가공의 인물임을 금방 알 수 있듯이, 양만춘이라는 이름 역시 창작의 소산임을 보여드리기 위해서이다. 양만춘을 비롯해 위 인물의 이름이 모두 중국식으로 작명되었다는 점만 보아도 분명하다. 조선시대 문헌기록에는 '양만춘(楊萬春)'이라는 이름도 전하는데, 이는 위 당서연의라는 책을 직접 보지 않은 채 양만춘이라는 이름만 듣고, 중국에서 흔한 성씨인 '양(楊)'의 잘못이라고 짐작해서 바꾼 결과일 뿐이다. 게다가 양만춘의 출신 부라는 절노부, 관노부는 3세기 때 고구려 사회 모습을 전하는 '삼국지'라는 역사서에서 보이는 내용이다. 고구려 말기에 이런 부명이 있을 리 만무이다. 양만춘이란 이름이 작가의 창작물이라는 증거일 뿐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이 역사 속에서 자주적 자긍심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안시성 전투와 안시성주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당서지전통속연의'라는 소설에서 만들어진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면서 널리 알려진 듯하다. 물론 양만춘이라는 이름을 믿을 수 없다고 본 지식인들도 적지 않다. 안정복이나 이규경, 이덕무 등은 그 이름이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아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얼마 전에 안시성 전투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에서도 안시성주가 양만춘이란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 영화만이 아니라 대부분 안시성주 이름을 양만춘이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 경우에 당시 상황에서 안시성주에 대한 관심은 높은데, 문헌 등을 제대로 조사할 형편이 아니라는 점에서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오히려 안시성주의 이름을 알고 싶어하던 그분들의 자주 의식을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명나라 때 한 통속 소설가가 가상으로 만든 '양만춘' 이름을 지금까지도 거론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아쉽지만 안시성주의 이름을 모른 들 또 어떠하겠는가.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이름 석 자가 아니라 안시성주가 보여주었던 용기와 지혜, 굳건한 리더십이 아닐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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