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의 눈] 잔혹한 진압의 흔적 27일 도청 사망자들

곽선정 입력 2020. 5. 14. 21:50 수정 2020. 5. 1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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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1980년 5월 27일 광주 도심 곳곳에 시민군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전남도청에 남아있던 시민 2백여 명은 마지막까지 도시를 지키고자 했죠.

이날 도청에 투입된 병력만 공수부대원 8백 70여 명.

진압작전 중에 시민 열일곱 명이 희생됐습니다.

5·18 40주년을 앞두고 준비한 KBS 연속보도 오늘(14일)은 그 세 번째로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 당시 잔혹했던 학살의 기록 들여다봅니다.

곽선정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1980년 5월 27일 새벽.

엿새 전 금남로에서 철수했던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다시 진입합니다.

작전명은 '상무충정작전'.

최후까지 도청과 도청 앞 YWCA안에 남아있던 시민군 17명이 군의 총탄 등에 숨졌습니다.

당시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씨의 시신은 그날의 참상을 똑똑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상반신 전체에 3도 화상을 입었고 아랫배엔 흉기로 크게 베였습니다.

가족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신 상태는 끔찍했습니다.

검찰 조서에는 화상을 입은 후에 자상이 생긴 걸로 추정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화상으로 쓰러진 윤 씨의 시신을 누군가 훼손했을 가능성도 남아있습니다.

[윤정희/윤상원 열사 동생 : "처음에 우리가 시체를 못 찾았어요. 시신을 보니까 머리도 터지고 화상을 입어버렸어요. 그래서 마음 아파요. 두 번 죽였잖아요."]

전남도청에 남았던 평범한 청년들과 학생들은 고도로 훈련받은 공수부대원들 앞에서 잔인하게 짓밟혔습니다.

교련복을 입고 있던 문재학 군은 배와 목에 총을 맞았고, 턱 부분이 골절되는 등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김종연 씨는 몸 5곳에서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발견됐습니다.

신군부는 전남도청에 숨진 희생자들이 마치 시민군의 총에 사살된 것처럼 총기 종류를 왜곡하려 한 정황도 확인됐습니다.

서호빈 군은 사출구가 작다며 시민군이 들었던 카빈으로 기록했지만, 검찰은 M16으로 봤고, 문용동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희송/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 "공수특전사의 역사를 유지할 수 있는 놀라운 전과였다 이런식으로 평가를 했거든요. 군의 작전이 대단히 공격적이고 보복적이지 않았나 생각을 해보는 거죠."]

신군부는 진압작전을 광주의 안정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고의적이고, 무자비한 진압이었음을 희생자의 주검들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KBS 뉴스 곽선정입니다.

곽선정 기자 (coolsu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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