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에게 총을 겨누지 말라' 안병하 치안감을 아십니까?"

CBS 김현정의 뉴스쇼 2020. 5. 1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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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광주 16일까진 평화로웠다
'평화시위' 경찰이 에스코트 하기도
안병하 국장 "학생들 다치게 하지 말라"
공수부대, 진압봉 휘두르며 강경진압
상부 지시 거부한 죄로 12일 간 고문
80년 5월, 명예회복되지 않은 경찰들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2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이재의(5.18기념재단 상임연구위원), 전임순(고 안병하 치안감 아내), 안호재(고 안병하 치안감 아들)

오늘이 벌써 5월 15일입니다. 다음 주 월요일이면 5월 18일. 올해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 되는 해여서 더 뜻 깊죠.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세 분을 모셨습니다. 우리가 5.18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알아왔는데도 이분의 존재는 잘 모르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사실 역사로 따졌을 때는 그렇게 오래 전부터 조명받기 시작한 분이 아니세요. 바로 안병하 전 치안감입니다.

경찰로서 시민을 향해서 총을 겨눌 수 없다면서 신군부의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은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017년이 돼서야 우리나라 경찰영웅 1호로 선정이 되셨어요. 이 안병하 치안감의 이야기를 귀한 손님 세 분과 함께 해 보죠. 먼저 고 안병하 치안감의 아내세요. 전임순 여사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여사님, 건강은 어떠세요?

◆ 전임순> 뭐 나이가 있으니까 그렇죠, 뭐.

◇ 김현정> 올해 연세가?

◆ 전임순> 여든여덟.

◇ 김현정> 여든여덟. 정정하십니다. 나와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이쪽으로는 아드님 안호재 선생님, 어서 오세요.

고 안병하 치안감 아들 안호재 님(좌), 아내 전임순 여사(우)
◆ 안호재> 안녕하세요.

◇ 김현정> 올해의 느낌은 좀 다르시죠?

◆ 안호재> 많이 색다르죠. 아버님의 정신이 기록이 됐다는 게 최초 지금 기록이거든요.

◇ 김현정> 최초의 책입니까? 안병하 평전?

◆ 안호재> 아무 데도 연구자료 조차 없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광주시민들이 많은 분들이 조금 조금씩 힘을 보태주셔서 이런 영광스러운 날이 왔습니다.

◇ 김현정> 그 안병하 평전의 저자가 지금 옆에 앉아계신 거죠? 5.18기념재단의 상임연구원이신 이재의 위원님, 어서 오십시오.

◆ 이재의> 안녕하세요.

◇ 김현정> 우리 이 위원님은 5.18시민군이기도 하셨던 거죠?

◆ 이재의> 네, 그때 당시에 전남대학교 학생이어서 시위에 같이 참여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쭉 진행되는 경과를 지켜봤었죠.

◇ 김현정> 그렇죠. 이번에 책을 내야겠다, 안병하 평전을 써야겠다고 결심하신 건 어떤 계기입니까?

◆ 이재의> 그것은 정말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1993년도에 제가 지방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기사 하나를 보니까 광주 5.18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이 실시가 됐던 때였거든요. 그런데 경찰국장이, 전남 경찰국장이 피해자로 신고를 했더라고요. 이거 이상한 일이다. 광주시민이 피해자면 피해자지 왜 경찰이 피해자였단 말인가. 정말 이상하지 않아요?

◇ 김현정> 이상하네요.

◆ 이재의> 그래서 관심이 끌려서 한번 자료를 찾아보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돌아가신 뒤였는데 그래서 사모님을 찾아가서 만나 뵀습니다. 그때까지는 잘 몰랐는데 만나보고 정말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내가 5.18을 광주에서 지켜봤기 때문에 상당히 이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반쪽의 진실밖에 모르고 있었구나 이런 충격적인 생각을 갖게 됐죠.

◇ 김현정> 이제 그 이야기를 풀어가려고 하는데요. 우선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서 어머님, 5.18 40주년을 맞는 소회가 어머님은 어떠신가요? 어머님 이야기 좀 듣고 싶습니다. 아내십니다. 전 여사님.

◆ 전임순> 정부가 5.18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지 못한 것 같았어요.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그것이 제대로 이 박사님이 책을 쓰심으로써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는 것, 앞으로 그것이 저한테는 제일 감회가 깊고 너무너무 감사하고 오로지 그거였다고요, 제대로 좀 진실이 밝혀졌으면 하는 것.

◇ 김현정> 명예회복. 그것들이 책으로 나왔다는 것. 이게 너무나 기쁜 일이다. 감동스럽다, 그 말씀이시고. 안호재 선생님. 아버님, 안병하 치안감은 어떤 분이셨는가? 어떻게 해서 경찰국장까지 되신 거예요?

◆ 안호재> 저는 어렸을 때 놀이터가 경찰서 마당이었고 말벗이 경찰관들이었습니다. 모든 경찰들이 다 똑같은 줄 알았습니다. 아버님 명예 회복을 위해서 한 40년 쫓아다니다 보니까 우리나라 공직사회가 이렇지 않구나라는 걸 하나하나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거를 아버님의 정신을 한 사람이라도 더 이어받기를 원해서 나름대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 김현정> 그러세요. 아니, 그 전두환 씨와 육사 선후배 사이라고 들었는데.

◆ 전임순> 네. 저희는 8기생이죠.

◇ 김현정> 8기?

◆ 전임순> 네. 그리고 전두환 씨는 11기죠, 아마?

◇ 김현정> 11기. 전두환 씨가 후배군요. 안병하 치안감의 후배. 경찰 육사 출신인데 경찰에 복무를 하면서 전남의 경찰국장까지 갔다는 이야기는 전남도의 온 경찰을 다 통솔하는 역할을 하신 겁니까?

◆ 전임순> 그렇죠.

◇ 김현정> 그렇게 된 거예요. 자, 그러면 40년 전 5월 18일, 그 무렵으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사망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들어섰습니다만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조짐이 보이던 그때부터 이미 광주는 들썩들썩했던 거죠? 이 선생님.

1980년 5월 15일 전남대학교 정문에서 대학생들과 대치하고 있는 전투경찰들. (사진=나경택)
◆ 이재의> 그때는 뭐 광주만 그랬다고 하기보다는 전국적으로 특히 서울에서 학생 시위가 굉장히 큰 규모로 있었죠.

◇ 김현정> 제가 궁금한 건 초반에는 광주에서도 비교적 순조롭게 시위가 진행이 됐었다고 들었어요.

◆ 이재의> 그렇습니다. 특히 안병하 국장님께서 나중에 밝혀진 사실인데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요청을 하니까 ‘우리가 평화시위를 하겠다’ 그걸 보장해 달라 그러니까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어요. 믿지 못하고 그랬는데 너무 진정성이 느껴지고 그러니까 한 번 믿어보겠다 해서 5월 16일 날 마지막 평화시위를 하는데 경찰이 에스코트까지 이렇게 해 주고 밤중까지도 시위를 하고 그랬었죠. 그래서 교수 분들이 앞에 서서 그런 시위가 벌어질 만큼 평화 시위였습니다.

◇ 김현정> 그런데 상황이 어떻게 바뀐 겁니까?

<안병하 평전> 저자 이재의 5.18기념재단 상임연구위원
◆ 이재의> 그런데 하루 사이에 갑자기 저도 그때 학생회 일도 하고 있고 그래놔서 잘 아는데. 저희들은 다 이제 시위를 그치고 당분간 지켜보자. 우리 요구를 아마 정부가 고려를 한다고 하니까. 그래서 다들 쉬고 있을 때였는데 5월 18일 아침에 방송으로 저희들은 그 소식을 듣게 됐죠.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다. 그러면서 공수부대가 학교에 진주를 했고 이런 상황들이 벌어졌던 겁니다.

◇ 김현정> 아마 그날의 기억은 전 여사님이 생생하게 하고 계실 것 같아요.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됐던 그날. 그날 남편이 뭐라고 하셨는지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 전임순> 그때 열이틀 만에 처음 집에 들어오셨어요.

◇ 김현정> 열이틀 만에요?

◆ 전임순> 네. 그전에는 학생들 데모도 있고 하니까 집에 안 들어오셨거든요. 열이틀 만에 들어오시면서 이제는 광주는 한동안 데모를 안 할 것이다 하면서 너무 기뻐하시더라고요. 학생들이 참 데모를 승낙했더니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고 그랬다고 이제 한동안 데모가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동안의 경찰관들 외출도 내보내고 아마 그렇게 하셨다고 하더라고요.

◇ 김현정> 경찰들이 에스코트해 주고 평화롭게 그러니까 학생들과 같이 약속하면서 잘되고 있어, 이제는 좀 집에서 내가 눈 붙일 수 있겠어 하고 들어오신 거예요.

◆ 전임순> 그러니까 한동안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 김현정> 그런데?

◆ 전임순> 그래서 들어와서 이제 다른 때보다 굉장히 피곤한 기색도 없더라고요. 너무 학생들이 그렇게 한 것이 너무 기뻤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무사히 끝나고 아마 그때 17일 날 집에 들어오셨죠. 그래서 이제 주무시는데 비상이 걸렸어요. 그래서 사무실에 나가서 계엄령이 확대됐다고 얘기하더라고요.

◇ 김현정> 확대됐다고. 후다다닥 다시 옷 입고 뛰쳐나가신 거예요? 이재의 위원님, 무슨 일이 그럼 그때 벌어진 겁니까?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5.18 하면 계엄군을 생각하잖아요.

◆ 이재의> 그렇습니다.

◇ 김현정> 그런데 경찰까지 나와서 도와라, 이렇게 된 거예요?

안병하 전남도경찰국장 (<안병하 평전> 수록)
◆ 이재의> 원래는 경찰이 치안을 책임을 지고 있죠. 현지 치안은 경찰이 지는 건데 비상계엄이, 그때도 비상계엄이었어요. 그런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부분 계엄이었죠. 그런데 5.18을 5월 17일 밤에 제주도를 포함해서 전국 비상계엄으로 확대를 하면서 군을 이렇게 투입하는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죠. 그래서 그때도 이제 당연히 비상계엄이 확대됐다고 그러니까 경찰국장께서 부랴부랴 나갔겠죠. 그리고 평상시처럼 좀 더 강화된 형태의 경계를 펼치려고 준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 김현정> 처음부터. 우리는 사실은 5.18 하면 군 생각하지만 원래는 경찰이 시위대도 에스코트하고 평화롭게 시위할 수 있게 해 주고 치안 유지하고 계엄이 내려지던 그 순간까지도 사실은 경찰이 하고 있었는데.

◆ 이재의> 그렇죠. 그리고 원래 경찰이 경찰력이 도저히 진압을 못 할 때 시위 규모가 커져서 그럴 때 계엄군을 투입해 달라고 이렇게 요청을 하면 투입이 이루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지금 일이 벌어져버린 것이죠.

◇ 김현정> 그런데 전두환 회고록에 보면 전두환 씨 측의 주장은 그래요. 경찰력이 무력화됐기 때문에. 안병하 치안감이 말하자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공수부대를 투입시킬 수밖에 없었다 치안 유지하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 이재의> 그 대목이 그야말로 5.18에서 가장 왜곡이 심하게 된 그런 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이 부분의 진실을 밝혀주는 것이 당시 안병하 도경국장의 행적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분은 당시에 계엄군 투입을 요청을 하지도 않았고 또 할 필요도 없었고. 왜냐하면 그날 전남 경찰 총 병력수가 2000명이었거든요. 그런데 학생들은 기껏 해야 처음에 전남대 앞에서 200명으로 시위를 시작해서 금남로에 나왔을 때는 한 500명 정도로 불어났단 말이죠. 그리고 하루 종일 시위대 숫자가 아무리 전체를 다 합해도 1000명을 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경찰력보다 절반도 안 되는 그 학생들을 진압을 하는데 무슨 군인이 필요했겠습니까?

그런데 학생들 숫자가 이렇게 불어났던 것은 아마 안병하 국장님께서 생각했을 때 경찰이 진압을 못 하면 아마도 계엄군이 곧 투입이 되지 않겠느냐라는 우려를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상당히 좀 강경진압을 16일, 17일 시위 상황하고 다르게 강경 진압을 일부러 했다고 그러더라고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까.

◇ 김현정> 그렇게 수가 많아지면서 공수부대까지 투입이 되고 이렇게 된 상황. 그 후에 18일이 됐습니다. 18일 날이 밝고 나서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치안감께서는 이제 안 된다. 강경 진압을 하면 절대 안 된다, 이런 입장이 되신 거예요?

◆ 이재의> 그렇죠.

◇ 김현정> 지시를 따르지 않고.

◆ 이재의> 평상시 이분의 시위 진압, 혹은 시위 관리라고 하는데 절대 학생들을 다치게 하지 마라. 그리고 도망가는 사람들을 끝까지 추격하거나 이러지 마라 우리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목표지 이 사람들을 잡아다가 두들겨 패고 부상을 입히고 이런 건 아니지 않느냐. 이런 원칙을 오랫동안 견지를 했더라고요. 보니까.

◇ 김현정> 그런데 위에서는 강경진압 해라라는 명령이 내려왔던 거잖아요. 이분께서는 리더, 국장이었던 거고 그보다 더 위의 상부에서 계속해서 강경진압 하라고 나오고. 이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 이재의> 그러니까 굉장히 곤혹스러웠던 것 같아요. 그래서 굉장히 나름대로 열심히 했죠. 진압을 열심히 하는데 경찰, 아까 그런 원칙 속에서 여러 차례 하부에 명령을 지시를, 하달을 합니다. 절대 뒤쫓지 마라, 다치게 하지 마라. 이런 식으로 계속 하는데. 갑자기 계엄군이 오후가 되니까 투입된다는 소식이 들렸던 거예요. 그러니까 오후 4시에 계엄군이 투입이 됐는데 한 3시 반쯤에 지시를 합니다. 곧 있으면 계엄군이 투입이 되니까 우리가 2선으로 빠지고 1선은 계엄군이 맡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된 것이죠.

◇ 김현정> 집에서는 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집으로 들어가 실 수 있는 여력이 됐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혹은 후에는 회고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상황을 뭐라고 하시던가요?

◆ 전임순> 그 당시 17일 날 저도 데모가 없다니까 너무 안심했죠. 그런데 밤에 비상이 걸려 나가신 다음에 잠이 이뤄지지 않더라고요. 왜 갑자기 그렇게 계엄령이 선포됐을까. 그래서 아침이 되니까 경찰 가족들도 이상해서, 궁금해서 모두 서장 부인들이랑 오더라고요. 그러면서 모두 궁금해서 웬일이냐고 무엇 때문에 계엄령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 김현정> 그런데 이제 제가 궁금한 건 얼마나 고민을 하고 갈등하셨을까 그 부분이에요. 어디다가 후배들한테 얘기도 못하고 집에서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그 고뇌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아요. 위에서는 강경진압을 하라그러고 내 임무는 그건데 나는 차마 시민들을 향해서 총을 쏠 수 없고 강경진압 할 수 없고 봉을 휘두를 수 없는 그 심정, 뭐라고 하셨어요?

◆ 전임순> 그런데 그 당시에 그 상황을 제가 봤어요. 거기 있으면서 그래서 경찰 가족들하고 오면서 대학교에 군인들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전 내다보지 않아서 몰랐거든요. 그래서 오면서 왜 군인들이 학교에 주둔을 했을까. 또 학생들이 이제부터 학교를 모두 등교한다고 했는데 학생들이 바깥에 있고 군인이 교정 안에 있고 하니까 학생들이 바깥에 그렇게 몰려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이제 가족들이 모두 궁금해서 우리도 나가 보자. 그래서 진짜 학교 앞에 가니까 학생들이 바깥에 있고 군인들이 있는데 돌을 던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때는 처음에는 심하지를 않았어요. 그러면서 학생들이 자꾸 모이더라고요. 아마 등교하려고 그때는 모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못 들어가게 되니까 그냥 몰려 바깥에 있었죠. 그래서 그러면 파출소 앞에도 또 가봤어요.

◇ 김현정>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가게 되면 오늘 하루 종일 하셔도 다 못 풀만큼의 사연이 있을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런데 지금 시간관계상 하나하나 다 들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저는 어머니, 궁금한 것이 그렇게 하고 나서 시민들을 향해 진압해라, 강경진압 해라라는 이야기를 끝까지 국장님은 그 지시를 받지 않으시다가 들을 수 없다 하시다가 결국은 끌려가고 합동수사본부로 끌려가신 거죠?

◆ 전임순> 네.

◇ 김현정> 그리고는 소식이 끊긴 겁니까?

◆ 전임순> 네, 그런데 저희가 봤잖아요. 그러자 군인들이 들어오더니 우리는 들어오기를 기다렸어요. 군인들이 그러면 학생들이 좀 막을 것이라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지휘봉 가지고 마구 때리고 온통 피투성이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차에 태워서 보내고. 그래서 아, 이거는 아닌데. 그래서 국장님이야 뻔 한 거 아니겠어요? 경찰도 우리가 볼 때 그런데 경찰도 학생들 편을 안 들겠어요?

◇ 김현정> 끌려가서 고문당하시고 나오시고 나서는 어떤 후유증들을 앓고 어떤 고문당하시고 고생하신 거예요? 이 위원님.

◆ 이재의> 아마 불빛을 계속 비췄던 모양입니다. 잠을 못 자게 한 거죠. 이런 것이 트라우마에서 굉장히 중요한 정신적인 내상을 입히는 그런 것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것이 합병증 원인이 된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 김현정> 얼마 동안이나 고초를 당하셨어요?

◆ 이재의> 한 12일 정도인 것 같습니다.

◇ 김현정> 12일 정도. 우리 아드님은 그때 기억은 없으신가요? 기억나십니까? 혹시.

◆ 안호재> 그때가 제가 대학 2학년생이었습니다.

◇ 김현정> 대학생이면 다 기억하시겠네요. 아버님 소식이 12일이나 끊기고. 세상에 치안감, 그 높은 자리에 계셨던 분을.

◆ 안호재> 경찰에서도 정확한 상황을 이야기 안 해 주고 아무도 이야기를 안 해 줬죠.

◇ 김현정> 아무리 물어도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 안호재> 뉴스만 봤습니다, 하루 종일.

◇ 김현정> 세상에.

◆ 안호재> 가족들이 모여서.

◇ 김현정> 그리고 돌아오신 날은 어땠는지 기억나십니까?

◆ 안호재> 처음에는 당당하게 들어오셨어요. 몰랐어요. 그랬더니 돌아오신 다음부터 바로 수시로 쓰러지시고 응급실 가시고 반복이었습니다.

◇ 김현정> 가족들 마음 아플까 봐 다 얘기 안 하셨군요.

◆ 안호재> 아버님이 성격이 남한테 그런 걸 보이는 걸 싫어하세요.

◇ 김현정> 아이고... 그리고는 일찍 세상 떠나셨어요.

◆ 안호재> 네.

◇ 김현정> 그런데 더 서러운 것은 경찰이었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로 인정받고 이 사실을 알리는 것에 너무나 오래 걸린 거 아닙니까?

◆ 안호재> 삼십 한 여 년이 걸렸는데 그런데 지금에 봐서도 제가 우리나라 참 문제점 중에 하나인데 왜 본분을 다한 공직자는 왜 피해를 받아야만 하나? 저희도 저희 부친을 최고의 경찰 영웅이라 칭하면서도 저희 유족에 대해서는 그만한 많은 손해를 보고 있거든요. 그러면 가족을 사랑했던 부친이 지금 국립묘지에 영면하고 계시면서 편히 눈감고 계실까? 그건 상당히 의아스럽습니다.

◇ 김현정> 이 위원님, 자세한 이야기,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다 하시는 분들은 안병하 평전을 읽으시기를 저는 권하고 싶고요. 끝으로 지금 아드님이 말씀도 하셨습니다마는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뭘까, 정리를 좀 해 주시죠.

◆ 이재의> 가장 1차적으로는 당시에 안병하 국장님만 당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따랐던, 그분의 지시에 따랐던 간부들이 대부분 면직되거나 특히 목포 경찰서장 같은 분은 구속까지 됐고. 그리고 그 뒤에 더 빨리 돌아가셨어요. 안병하 국장님보다.

◇ 김현정> 고문 후유증이 있었어요, 그분도?

◆ 이재의> 그렇습니다. 그분이 4년 뒤에 돌아가셨는데 그런 분들 명예도 전혀 회복이 안 돼 있었거든요. 그런 명예회복이 1차적일 것 같고요. 두 번째로는 진상 자체가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이것은 그야말로 민간 수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 이 자체가 정확히 밝혀진 건, 공식적으로 밝혀진 건 아니거든요.

◇ 김현정> 알겠습니다. 남은 과제들이 더 많다. 책이 나왔으니 됐다가 아니라 국민영웅 됐으니 됐다가 아니라 더 남은 과제들을 우리가 꼭 상기해야겠습니다. 오늘 세 분 귀한 걸음 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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