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40주년] "눈물로 산 40년, 말로 다하겠소.. 나 죽기 전에 진상규명이라도"

김종구 2020. 5. 1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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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최초 사망자 김경철씨 모친 임근단씨

점심 먹고 나오다 잡혀간 큰아들, 청각장애로 도망 못가고 곤봉 세례

핏덩이 손녀 업고 아들 제사… 데모하다 잡혀 지리산에 버려지기도

1980년 5ㆍ18 최초 사망자 김경철씨의 어머니 임근단씨가 눈물로 보낸 지난 40년을 설명하고 있다. 김종구 기자

“돌도 안 된 핏덩이 손녀를 등에 업고 아들 제사 지내러 망월동 묘지를 다닌 에미의 심정을 어찌 말로 다하겠소. 정말 고생 많이 했지….”

1980년 5ㆍ18민주화운동 최초 사망자 김경철(당시 29세)씨의 어머니 임근단(89)씨. 임씨는 구순(九旬)을 앞둔 고령이지만 ‘눈물로 보낸 지난 40년’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36세에 홀로 돼 5남매를 악착같이 키워낸 여장부지만 큰아들 경철이만 생각하면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비록 청각장애는 있었지만 잘 생기고 똑똑했던 경철이가 80년 5월 공수부대원의 곤봉에 맞아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행복했던 삶은 송두리째 날아가 버렸다.

경철이는 19일 오후 3시쯤 친구 3명과 함께 광주 동구 충장파출소 근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오다 공수부대원들과 마주쳤다. 공수부대원의 불호령을 듣고 다른 친구들은 도망쳤지만 경철이는 말을 듣지 못해 붙잡혀 곤봉세례를 받은 뒤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당시 광주에 있던 국군통합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숨졌다.

임씨는 “그날을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충장로 광주우체국 근처에서 식당을 하던 그는 대학생들을 팬티만 입힌 채 군용 트럭에 싣고 가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 벌떡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에 와보니 경철이가 안 보였다. 이상한 예감이 들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허둥지둥 적십자병원을 거쳐 통합병원으로 달려갔다. “며느리와 같이 영안실로 따라갔더니 소주 한 잔 부어놓고 촛불이 켜져 있었어요. 빨간 서랍을 열고 홑이불을 걷어내니 우리 아들이여. 며느리가 그것을 보고 뒤로 자빠져버린 거예요”. 그는 기절한 며느리를 응급실로 데려가느라 아들 얼굴 한번 만져보지 못한 것이 지금도 한(恨)으로 남았다고 했다. 경철이는 중학교 졸업 후 서울의 한 양화점에서 7년간 일하며 기술을 배운 뒤 광주로 내려와 양화점에 근무하고 있었다.

임씨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아들이 남기고 간 손녀 혜정이다. 혜정이는 태어나 백일이 지나자마자 아버지를 잃고 그 다음해에는 어머니마저 곁을 떠났다. 홀로 남은 혜정이를 키우는 것은 할머니 몫이었다. 혜정이는 그때부터 할머니를 ‘엄마’라 불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무정한 새끼야 죽으려면 혼자 죽지, 새끼 하나 낳아놓고 내 가슴에 이렇게 멍이 들게 하냐”고 속앓이도 했다.

임씨는 80년대 초 핏덩이 혜정이를 등에 업고 매일 광주 북구 망월동 묘지를 찾아 다니며 데모를 했다. 아들 잃은 부모 20여명이 매일 모여 “전두환이 물러가라. 우리 아들 살려내라”고 시위를 벌였다. 당시 독재정권 하수인들이 유족들을 폭도로 매도하고 데모를 막기 위한 특수공작(?)을 폈다.

“이놈들이 데모하고 있으면 망차(시위 진압용 경찰차)에 태워서 지리산 골짜기나 고속도로 중간 등 사람이 없는 곳에 내려놓고, 밤 새 광주로 와서 다시 모여 싸웠제”라며 치를 떨었다.

임씨는 온몸을 던져 목숨을 걸고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고 광주항쟁의 정신을 알리기 위해 지금까지 전국을 백방으로 뛰며 살아왔다. 아들의 피가 헛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은 많다”고 했다. 최초 발포 명령자와 헬기사격 등 5ㆍ18진상규명과 옛 전남도청 복원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 때 진상규명을 제대로 해야제. 누가 죽고, 헬기가 어떻게 했고 이런 것까지 다. 나 죽기 전에 옛 전남도청 복원도 잘 마무리됐으면 좋겠습니다.” 임씨는 이어 “솔직히 지가 잘못했다고 하면 우리도 용서할 수 있잖아요. 근디 끝내 안 했다고 저렇게 허요. 우리도 뻔히 알고 있는디….”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쓴소리다.

최근 자유연대 등 보수단체들의 광주 집회나 유튜버들의 광주 폄훼와 왜곡에 대해선 단호했다. “작년에 전두환이 왔을 때 어찌나 수상한 소리를 하던지 속에서 천불이 나드만. 저런 것들이 어떻게 광주에 발붙일 수 있냐고 한번 싸우고 나서 사람 같지 않아 상대를 안 해”라고 잘라 말했다.

임씨는 이제 스스로를 위로하며 산다. 아들 핏값으로 받은 보상금의 일부를 성당의 성모상을 짓는 데 보태고 매일 기도생활을 하고 있다. 5년 전에는 광주트라우마센터의 치유과정을 거치며 많은 위로를 받았다.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ㆍ18민주묘지에 있는 김경철씨 묘. 김종구 기자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ㆍ18민주묘지 중앙에 우뚝 선 추모탑을 지나 묘역에 들어서면 왼쪽 맨 첫자리에 김경철씨의 묘가 있다. 묘비엔 임씨와 딸 혜정씨의 간절한 소망이 적혀 있다.

“엄마와 못다한 정에 울고 있을 내 아들아! 내 생이 끝나는 그날 자랑스러운 네 모습 볼 수 있을 날 기다린다. 에미가….”

“아빠! 뵙고 싶을 때가 많아요. 단 한 번이라도 아빠를 불러 보고 싶은 이 소망 아실는지. 딸 혜정이가….”

광주=김종구 기자 sor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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