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집 갖지만 외롭지 않은 둥지 '베기넨호프'

2020. 5. 1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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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부터 이어온 여성공동체 베기넨
베를린의 '베기넨호프', 50여명 거주
살롱 열어 토론, 공동정원에서 담소

자기 집에서 사생활 가지면서
문 열면 활기찬 공동체로 이어져
집에서 생 마감하고픈 이웃 돕기도
독일 베를린의 베기넨호프에는여성 50여명이 모여 산다. 층마다 있는 아케이드에서 거주자들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 베르벨 메센 제공

[토요판] 채혜원의 베를린 다이어리

21. 여성들이 모여 사는 베기넨호프

중세시대 유럽에는 ‘베기넨’(Beginen)이라는 여성 주거 공동체가 있었다. 이곳에 사는 여성들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면서 종교 활동과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일에 앞장섰다. 대부분 교사, 간호사, 공예가 등 다양한 직군에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으며, 개인 재산을 포기하지 않고 집을 소유했다. 베기넨은 유럽 곳곳으로 퍼졌는데,1264년 즈음 설립된 파리의 베기넨에는 약 400명의 여성이 모여 산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는 15세기에 지은 베기넨 여성들이 살았던 건물 ‘베헤인호프’(Begijnhof)가 도시의 유명한 랜드마크로 보존되어 있다.

독일의 도시계획가인 유타 켐퍼(84)는 20년 전 암스테르담 베헤인호프를 방문하고, 베기넨 전통을 독일에서 이어가기로 결심한다. 남편이 사망한 뒤, 그는 자녀 넷을 혼자 키웠다. 도시계획가로 일하면서 비혼이나 이혼 또는 사별로 혼자 사는 수많은 여성도 만났다. 그들은 혼자 남지 않고 누군가와 함께 공동체를 이뤄 살고 싶어 했고, 유타는 베헤인호프를 떠올렸다. ‘베기넨처럼 각자 집을 소유하되 함께 여성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공동주택 프로젝트를 해보자.’ 그는 이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해 1992년 베기넨협회를 설립했고, 2000년 건축가 바르바라 브라켄호프가 합류하면서 구상은 현실이 되었다.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에 있는 베기넨호프 전경. 채혜원 제공

공동체 생활 원하는 노년 여성들

여성 공동주택 건립 소식에 독일 전역에서 약 2천여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여성만 집을 살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입주 조건이었다. 6층으로 나뉜 건물은 53가구로 구성돼 있고, 한 집의 크기는 56~77㎡. 햇볕이 쏟아지는 테라스를 포함하고 있다. 집값은 ㎡당 2100~2300유로(약 280만~305만원)으로, 약 1억6천만원이면 작은 집을 살 수 있었다.

수년간의 준비 끝에 드디어 2007년 가을,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 지구에 ‘베기넨호프’(BEGINENHOF)가 들어섰다. 독일 전역에서 여성 53명이 새 보금자리를 찾아 이사했다. 베기넨호프는 국제여성공간(IWS) 사무실과 가까워 늘 지나다니는 곳인데, 주변과 달리 여러 색을 띠고 있는 베기넨호프 건물에 도착하면 널찍한 연회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는 거주자와 외부 참여자가 함께하는 문화 전시회, 정치토론모임, 기공체조교실, 작문발표회 등 요일별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예를 들어 거주자인 역사학자 기젤라 노츠 박사는 비정기적으로 역사 살롱을 열어 경제·노동·정치 등 여러 주제로 토론을 벌인다. 매달 거주자 회의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이 공간 외에도 건물에는 텃밭 정원, 개방형 부엌, 옥상정원 등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이 갖춰져 있다. 현재 30살부터 85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살고 있지만 대부분 60대 이상의 시니어다. 53가구 중 대부분 혼자 살며, 네 가구만 파트너나 가족과 함께 2인이 살고 있다.

지난 4월28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베기넨호프에 도착하자 대외소통 담당자인 가브리엘레 가름스가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헤센주에 속한 풀다라는 지역에서 교사로 일해온 그는 남편과 사별 후 딸을 독립시키고 나서부터 혼자 살아왔다. 그는 늘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마침 그가 이사로 일하고 있던 풀다의 여성단체에서 사회학자 강의가 있었고, 그 강의를 통해 베를린에서 여성 공동주택이 계획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브리엘레은 긴 고민 없이 베를린행을 결정했다.

가브리엘레에게 베기넨호프에 대해 알린 것은 괴팅겐 출신 사회학자인 아스트리트 오스터란트다. 그는 오랫동안 공동체와 공동생활 주택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베기넨호프 기획 단계부터 함께 참여했다. 이 두 사람은 현재 이웃으로 산다.

건물을 둘러보니 거주자에게 이곳은 자신만의 집을 갖고 있으면서도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는 따뜻한 둥지다. 네 가구가 함께 사용하는 층별 공동 아케이드 공간은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고 이곳에서 여성들은 이웃과 함께 차 한잔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웃에게는 항상 비상열쇠가 있어 비상시 바깥에서 집 문을 열 수 있다.

가브리엘레는 “베기넨호프 여성들은 늘 다 같이 생일파티를 열고 크리스마스나 새해맞이 파티 때도 불꽃축제를 즐기며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기 원했던 여성들은 자기 집에서 사생활을 철저하게 보호받으면서도 동시에 문을 열고 나오면 활기찬 공동체에서 지낼 수 있는 바람을 이룬 것이다.

베기넨호프 여성들은 복지시설이 아니라 여성 공동체를 이뤄 노년기를 보내려는 이들의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독일연방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독일에는 총 1690만명(전체 인구의 약 20%)이 혼자 살고 있으며 이 중 33%가 65살 이상인 시니어다(2018년 기준). 독일의 65살 이상 인구는 1740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21%에 이른다.

스스로 조직한 프로젝트인 만큼 베기넨호프에는 정원을 돌보는 정원팀, 여성 예술가를 위해 전시를 기획 운영하는 예술팀 등 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여러 실무그룹이 있다. 1층에 잘 가꿔진 공동 정원에 도착하자 정원팀에서 일하는 코르둘라가 “정원이 참 아름답죠?” 하며 손님을 맞이한다. 그는 이곳으로 오기 전, 프라이부르크에서 자녀 셋을 키운 뒤 10년째 혼자 살고 있었다. 혼자 사는 것에 대한 만족도는 높았다. 하지만 지인이나 친구들이 모두 같은 동네나 도시에 사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만남을 위해 늘 멀리 이동해야 하는 부담이 커졌다. 이로 인해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레 시작됐다. 베기넨호프의 집을 사기로 한 친구를 통해 소식을 듣고 그는 지체 없이 베를린으로 이사했으며, 생활 만족도는 더욱 높아졌다.

베기넨호프 건립 10주년을 맞이해 지난 2018년 공동정원에서는 여성들이 모인 가운데 축제가 열렸다. Baerbel Maessen 제공

이단으로 몰렸지만, 세계로 이어져

중세시대의 베기넨 공동체가 그러했듯 베를린의 베기넨호프에도 컴퓨터 전문가, 사회학자, 극작가, 저널리스트, 의사 등 다양한 직업 경험이 있는 여성들이 모여 산다. 이들의 기여로 공동체에서 나눌 수 있는 일은 더욱 많아졌다. 코르둘라에 따르면 의사, 간병인으로 일한 경력이 있는 거주자들 덕분에 한 이웃이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5년 전 질환으로 먼저 떠나보낸 이웃이 있어요. 그는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생을 마감하길 원했죠. 혼자 병원에 있고 싶지 않으니까요. 여기 의사와 간병인으로 일했던 여성들이 있어서 그를 돌볼 수 있었어요. 많은 이웃이 그를 함께 보살폈고요. 그는 바람대로 많은 이웃이 함께한 가운데 먼 길을 떠났어요.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요.”

유타 캠퍼와 여러 여성이 만들어낸 공동주택 프로젝트는 베기넨호프로 끝나지 않았다. 2014년에는 베를린 프리드리히스하인 지구에 두 번째 여성 공동주택인 ‘플로라호프’(Florahof)가 문을 열었고, 여성 20명이 이곳에 살고 있다. 이 외에도 여성이 집 소유자로 공동체를 이뤄 사는 건물은 베를린에 약 20곳이 있다.

중세시대 유럽의 일부 베기넨 여성들은 봉사와 헌신으로 신의 뜻을 따랐지만, 정식 교구로 인정받지 못해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해졌다. 당시 가부장제 가족을 벗어나 있거나 치료 능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녀로 몰려 희생당한 수많은 여성들처럼. 그럼에도 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지 않았다. 독일 곳곳에 베기넨 형태의 공동체가 있고, 캐나다에도 최근 베기넨이 설립됐다. 다시 수많은 곳에서 여성들이 모여 살며 그들의 정신을 이어간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베기넨호프를 보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21세기에도 베기넨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채혜원: 한국에서 여성매체 기자와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다. 현재는 독일 베를린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국제 페미니스트 그룹 ‘국제여성공간’(IWS)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에서 만난 전세계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야기와 젠더 이슈를 전한다. 격주 연재. chaelee.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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