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위기, 여론에의 오만 때문"..韓 윤미향 사태와 닮은꼴
"검찰청법이 왜 문제되느냐"던 아베
사흘 뒤 "국민의견 듣겠다" 항복 선언
국민 반대를 반대세력 음모로 치부
"국민 불만은 곧 가라앉는다" 오만
'윤미향 의혹 제기=친일파 음모'
한국 여당 당선인들도 마찬가지
"내가 (집단적자위권 행사를 인정한) 평화안보법제를 만들었을 때도, ‘징병제가 시작된다’, ‘일본이 전쟁에 휩쓸린다’는 말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이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다."
지난 15일 밤 ‘우익 여전사’로 불리는 저널리스트 사쿠라이 요시코(櫻井よしこ)가 진행하는 인터넷 프로그램에 출연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쏟아낸 말들이다.
아베 총리가 언급한 건 검찰의 정년 연장을 위한 검찰청법 개정안이었다. 개정안은 검찰관의 정년을 현행 63세에서 65세로 연장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내각의 판단에 따라 필요한 경우 검찰 간부의 정년을 최대 3년간 더 연장할 수 있다'는 특례조항이 ‘검찰 장악 시도’ 논란을 불렀다.
문화계의 거물들을 포함해 "더이상은 못 참겠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틈탄 검찰 장악 시도"라는 반대 트윗이 하룻밤 새 500만개나 올라왔다.
전직 검찰총장 등까지 이례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높였지만 아베 총리는 우익인사가 진행하는 방송에 나와 “검찰 장악과 무관한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는 말만 늘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사흘 뒤인 18일 아베는 결국 국민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여야 한다. 국민의 이해 없이 (법안 처리를) 진전시키는 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는 검찰청법 개정안을 6월 중순까지가 회기인 통상국회(정기국회)에서 처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완전한 항복선언이었다.
코로나19에 대한 갈팡질팡 대응 탓에 안 그래도 최악인 민심에 검찰청법 문제까지 겹치면서 아베 내각 지지율은 '30%대 턱걸이' 수준으로 폭락했다. 자민당 내에서 "이런 상황에서 검찰청법까지 강행하면 일본 국민의 분노가 폭발할 것"이란 경고가 나오면서 폭주에 겨우 브레이크가 걸렸다.
사학재단 관련 스캔들이 최절정이던 2018년 봄 이후 가장 낮은 지지율, 일부 언론들은 "여기서 한 방만 더 터지면 아베 내각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언론들은 아베 내각 위기의 본질을 ‘여론의 흐름에 귀를 닫는 오만’에서 찾고 있다. 아사히 신문은 19일 “트위터에선 검찰청법에 대한 반대론이 들끓었지만, 아베 정부 고관은 '여론의 큰 물결을 느낄 수 없다'고만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여론의 비판은 한순간이고, 국민은 (자신들의 분노를) 곧바로 잊는다"(정부 고관)는 오만이 아베 내각 내에 퍼져있다고 지적했다.
지지율이 하락하더라도 경제 정책 등을 통해 만회하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인식이 아베 내각에 확고하게 뿌리박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신문은 "아베 정권의 주요 인사들은 SNS상의 검찰청법 반대 목소리를 ‘의도적인 반대’로 경시했다”고 분석했다. 여론의 저항을 ‘아베 정권에 늘 반대하는 인사들의 관성적인 반대’로 치부해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고, 아베 총리는 결국 2018년 이후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내몰리는 상황이 됐다.
이런 아베 내각의 태도는 ‘윤미향 사태’를 대하는 한국 집권당 일부 인사들의 인식과도 닮아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의원과 당선인들은 이번 사태를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운동을 폄하하려는 친일·반인권·반평화 세력의 부당한 공세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했다.
아베 내각이 검찰청법 반대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반대세력의 관성적 반대’로 몰아간 것처럼 이들은 윤미향과 정의연(정의기억연대) 관련 의혹을 '친일세력의 저항'으로 몰아가려 했다.
아베 총리는 결국 “국민 여러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며 '상처뿐인 퇴로'를 선언했다. 그의 참담한 선택이 한국 여당의 결단에도 좋은 참고가 됐으면 싶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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