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120척.. 그곳엔 누구도 구해주지 않는 10만명 있다

김수경 기자 2020. 5. 21.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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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감옥'에 갇힌 승무원들]
승무원 70%가 동남아·인도 출신.. 선사도 조국도 탈출시킬 의지 없어
코로나 우려해 美 등 수용 거부, 귀국 전세기 구해야 하선 허용
감금 길어지자 일부 극단적 선택도

대형 크루즈선 마제스티오브더시의 승무원 400여 명이 16일(현지 시각) 갑판에 모여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필요하냐"는 문구를 내걸었다. 마스크를 쓴 선원들은 "CEO는 편하게 자고 있느냐"며 항의했다. 두 달 넘게 배에서 내리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한 것이다.

승객 2700명을 태울 수 있는 이 배가 미시시피 걸프포트항에 도착한 건 지난 2월 29일. 승객들은 이날 모두 내렸지만 다음 항해를 준비하던 승무원들은 배에 남았다. 그러나 전 세계로 번진 코로나 여파로 다음 항해는 취소됐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가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해 3월부터 미국 영토에 승무원 하선을 전면 금지한 후 승무원들은 배에 꼼짝없이 묶였다.

방글라데시 출신 크루즈 승무원 라하만 무자비(26)도 선실에 60일 넘게 격리돼 있다. 그가 올해 2월 초 올라탄 크루즈선 스카이 프린세스가 미국 플로리다주 항구에 정박한 건 3월 17일이다. 승객 3000여 명은 이날 모두 배에서 내렸지만, 필리핀·인도네시아·인도 등 60여 나라에서 온 승무원 1300여 명은 내리지 못했다.

전 세계 바다에 승객 없이 떠 있는 크루즈선은 120여 척에 달한다. 크루즈 승무원 10만명이 이런 식으로 배에 갇혀 있다.

승객 3000여 명을 태울 수 있는 대형 크루즈선 스카이 프린세스의 객실에 ‘우리 돌아올게요(We will be back)’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미국 질병관리본부(CDC)가 코로나 확산 방지를 이유로 크루즈 운항을 금지한 후인 3월 18일 찍힌 사진이다. 하지만 이날 이후 이 배는 두 달 넘게 미국 플로리다 항구에 정박해 있고, 승무원 1300여 명은 하선하지 못하고 있다. /프린세스 크루즈

전 세계 크루즈의 절반은 중남미 파나마 선적이다. 까다로운 규제와 세금을 피하기 위해서다. 국제법상 자국 소속 선박이 아닐 경우 각 국가는 정박을 거부할 수 있고, 미국은 코로나 감염 위험을 이유로 하선을 거부하고 있다. 지난 1월 일본에 정박한 크루즈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에서 내린 승객 가운데 코로나 감염자가 700명 넘게 나오자 미국뿐 아니라 각 나라는 크루즈 하선뿐만 아니라 정박까지 금지하고 있다.

코로나가 점점 더 확산하자 CDC는 크루즈 운항 금지 기간을 7월 말까지로 연장했다. 또 승무원이 하선한 뒤 호텔과 여객기 이용을 금지하는 조건을 달았다. 승무원들이 까다로운 코로나 검사를 받고 크루즈에서 내리더라도 고국으로 돌아가려면 전세기밖에 방법이 없는 셈이다. 주급으로 500달러(약 62만원) 정도를 받아 고국에 송금하는 승무원들에게 그만한 거액이 있을 리 없다. 크루즈가 운항하지 않은 지난 두 달간은 이 주급마저도 못 받고 있는 형편이다. 4~6개월 단위로 승선 계약을 하는 승무원들을 위해 크루즈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다. 마이애미 헤럴드는 "선사 측에서 전세기 등을 마련하는 비용을 부담하지 못하겠다고 해 승무원들의 하선이 더 지연되고 있다"고 했다.

지난 3월 크루즈 셀러브리티 인피니티에 탑승한 브라질 출신 DJ 카이우 사우다냐는 악몽과 공황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그가 탑승한 뒤 코로나로 항해는 곧 금지됐고 배는 불 꺼진 유령선이 됐지만 두 달 가까이 내리지 못하고 있다. 회사 측에서는 직원들의 고국 송환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브라질 출신 승무원들을 한데 모은다며 크루즈를 세 번 갈아타게 했다. 브라질 출신을 한꺼번에 전세기에 태워 보내겠다는 것이다. 사우다냐는 CNN에 "우리는 짐짝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원치 않은 감금 생활이 길어지자 지난 2주 동안 승무원 4명이 잇달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지난 2일엔 그리스 피리아스에 정박해 있는 크루즈에 두 달 넘게 타고 있던 폴란드 출신 26세 엔지니어가 갑판에서 몸을 던졌고, 10일엔 미국 마이애미 앞바다에 떠 있는 크루즈에서 중국인 승무원이 선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전 세계 크루즈 승무원의 40%가 필리핀 국적이다. 30%는 인도네시아와 인도, 방글라데시 출신이다. 그들의 국가도 이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있다. 지난달 3일 필리핀 정부는 "필리핀 국적 크루즈 승무원들의 건강과 안전한 송환을 보장하기 위해 당국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추가 조치는 취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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