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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읽는 시간] 참으로 찌질하고 피로한

입력 2020. 05. 21.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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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페미니즘 읽는 시간]성착취 가해자 심리 분석한 <리벤지 포르노>

모든 명명에는 특정한 관점이 스며 있다. ‘리벤지 포르노그래피’(리벤지 포르노)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헤어진 상대에게 보복하려고 유포한 성적인 사진이나 동영상을 뜻했다. 이러한 명명은 가해자 입장을 부각한다. 피해자에게 ‘보복당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오인할 수 있다. 학대 행위가 ‘그럴 수도 있는 일’로 희석된다. 실제 가해자는 보복 의도 외에 돈벌이를 위해, ‘단순 재미’를 위해, ‘자기 자랑’을 위해 이런 행위를 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해당 용어에 대한 비판이 즉각 제기되고, ‘불법 촬영물’ ‘사이버 착취’ 같은 대체 용어도 제시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벤지 포르노’와 대체 용어가 혼재하는 현실은, 성폭력 가해자에 지나치게 관대한 사회문화,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법제도의 사각지대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사회가 ‘포르노’와 ‘착취’ 사이를 진동하면서, 한번 생산된 학대 이미지는 피해자가 죽든 가해자가 붙잡히든 상관없이 살아남아 누군가의 컴퓨터, 누군가의 스마트폰 화면을 경유해 끊임없이 피해를 재생산한다. 누구의 어떤 네트워크가, 어떤 사이버 문화가, 이 착취의 유통망을 계속 유지하는 걸까.

무신경함, 자랑, 추억, 전리품…

영국의 젠더, 남성성 연구자인 매튜 홀과 제프 헌은 2018년 내놓은 책 <리벤지 포르노: 젠더, 섹슈얼리티 그리고 동기>에서 가해자 언어를 분석해 이들의 행위를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서 풀이하려 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리벤지 포르노를 동시대의 사회문제이자 의도적으로 피해를 유발하는 사회적 관행으로 인식한다.” 연구자들이 가해자 말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건, 이들을 대신해 해명하거나 가해자 서사를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디지털 성착취 네트워크가 워낙 견고한 만큼, 가해자들을 깊이 분석해 가해 행위를 억제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전략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주요 분석 대상은 웹사이트 ‘마이엑스닷컴’에 올라온 1만1749개 게시물(2016년 3월28일 기준)로, 연구자들은 이 가운데 90%(1만576개)가 여성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나머지 10%(1173개)만 남성에 대한 것이었다. 동성애 게시물은 레즈비언 게시물 5건을 포함해 전체의 1%를 넘지 않으므로, 게시물 90%는 이성애 남성 가해자가 여성 피해자를 상대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자들은 일단 이성애 남성들이 이미지를 공개하며 쓴 내용을 주요 열쇳말로 분류했다. (*불쾌한 내용이 이어지니 주의 바랍니다.) -무신경함: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지만 그냥 이걸 올린다” -자랑: “내가 경험한 최고의 섹스” -추억: “그녀와 다시 자고 싶다” -전리품: “그 여자 남친이 내 축구팀에서 뛰는데 그녀는 계속 나랑 섹스한다” 등 가해자 입장의 다양한 ‘사유’ 가운데, 연구자들은 이른바 ‘복수’로 분류된 해명에 초점을 맞춘다.

가해자 대부분은 “자신을 사이버공간에 성적 노출 자료를 게시하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의 자리에 놓는다”. 가해자 입장에서 여성이 복수를 당해도 되는 이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여성의 “난잡한 성생활”로 인해 연인관계 혹은 결혼관계가 파탄 났다는 주장이다.

“최근에 헤어졌다. 내가 너무 통제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남자를 보는 족족 꼬리 치지 않았다면 전화기를 체크한다거나 페이스북 계정을 닫으라는 말까지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 그녀가 나랑 끝냈으니 이걸 나 혼자 가지고 있는 게 의미가 없다.”

결별 통보받자 통제권을 다시 획득하려고

글 속 가해자는 연애 중에 ‘데이트폭력’을 저지른 걸 자백하면서도, 그 폭력을 여성이 유발한 것으로 책임을 전가한다. 연구자들은 여성이 결별 통보를 한 결과, 가해자 남성이 자신의 남성성과 통제권이 훼손됐다고 판단해 이를 다시 획득하려고 디지털 학대 행위에 나섰다고 분석한다. “약화된 남성적 자아 감각은 스스로를 ‘진짜 남자’로 제시하면서 환원될 수 있다.” 여성에 대한 지배권을 쥠으로써만 온전해지는 이러한 남성성은 참으로 찌질하고 피로한 사회적 구성물이다. 여성은 섹스를 잘해도 보복 대상, 섹스에 서툴러도 보복 대상이 되며, 남성은 바람을 피우든 뭘 하든 ‘남자다운’ 행위의 일부로 포장된다.

연구자들은 가해자들이 온라인 공간을 남성이 지배한 곳으로 여기고, 성착취물을 “남성들끼리의 교제 일부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일 줄 알았는데(물론 많지만) 자신의 성적 문란함을 털어놓는 남성이 예상보다 많아서 놀랐다는 것. “남성 열람자들에게 ‘진짜 남자’ 인증을 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그의 동성 내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사이버 성착취는 복수 행위로서 정당화되는 것을 넘어, 이런 학대 행동 자체가 “규범적인 남성의 행동”으로 정상화되고, “동성끼리 자료를 교환하는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유지된다. 결국 연구자들은 불법 촬영물이 젠더 헤게모니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성차별의 역사는 유구하다. “리벤지 포르노는 새로운 행위라기보다 타인을 지배하고 학대하는 이미 잘 닦인 길을 더 확장하고 정교하게 만드는 행위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온라인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성차별주의적이고 여성혐오적인 텍스트라는 문화적 맥락 안에서 더 두드러진다.”

‘단순 소지’ ‘단순 시청’이라는 명명

분석 대상이 된 ‘마이엑스닷컴’은 미국인이 운영하지만 소유주는 네덜란드 법인으로 돼 있다. 네덜란드에 리벤지 포르노 방지법이 없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초국적 대응을 주문하는 이유다. “리벤지 포르노가 존재하고 유포되는 현상은 성적 학대를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온라인 환경”과 “네트워크화된 여성혐오”가 주요하게 작동하므로, 온라인과 친밀한 젊은층에서 피해자도 가해자도 늘고 있다. 연구자들은 “학교 기반 개입은 젊은이들이 피해자건 가해자건 일생 동안 폭력의 굴레에 얽매이지 않도록 돕는 방법을 모색한다”고 말한다. 아직 불법 촬영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는 없지만, 데이트폭력과 관련해서는 학교 교육에 불평등한 젠더 기준, 관계에서의 힘과 통제 문제 등을 포함할 경우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불법 촬영물의 유포와 확산이 “가상의 동성 집단 앞에서 사회적 압력”에 영향받는다는 연구 결과를 상기하면, 불법 촬영물의 ‘단순 소지’와 ‘단순 시청’이라는 명명 또한 지극히 남성사회 관점임이 드러난다. 불법 촬영물과 관련한 어떤 행위도 ‘단순’할 수 없다.

김효실 <한겨레> 기자 tran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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