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혜리의 시선] 윤미향의 탐욕이 고맙다

안혜리 2020. 5. 2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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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권력 탐하느라 벗겨진 가면
여당·친여 인사들 수준도 드러내
도덕경의 '성긴 그물' 경고 모르나
안혜리 논설위원

윤미향의 탐욕이 고맙다.

자기 것이 아닌 법인·단체 기부금을 개인 통장 여러 곳에 넣어두는 돈 욕심에 그치지 않고, 여당 비례대표 국회의원이라는 정치권력까지 탐한 덕분에 성역이 된 적폐세력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하는 말이다. 과도한 욕심만 부리지 않았다면 윤 당선인은 아마 수익성 높은 개인 비즈니스로 전락한 정의기억연대(정대협 후신)를 꽤 오랫동안 주무르면서 세상 사람들을 계속 속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감히 이 적폐세력에 문제를 제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우리 사회는 또 어마어마한 비용을 치렀을 거다.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게 해준 그의 탐욕이 고마울 수밖에 없다.

윤 당선인은 “위안부 할머니들 앞세워 모은 돈을 어디에 썼느냐”는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이후 연일 쏟아져 나오는 의혹에 제대로 해명하기는커녕 관행과 실수, 심지어 친일세력과 보수언론의 모략극이라고 우겨대면서 기어이 국회의원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미 16년 전 일본 법정에서 최초로 위안부로 인정받은 고(故) 심미자 할머니가 “악마”라는 험한 표현까지 쓰며 똑같은 폭로를 했지만 무탈하게, 아니 오히려 ‘사업’을 더 확장한 경험이 있으니 잠시만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완벽한 착각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투명해지면서 사람들이 시민단체에 들이대는 잣대가 훨씬 엄격해졌을뿐더러, 이젠 무명의 시민단체 일원이 아니라 거대 여당의 국회의원 당선자로 신분이 달라졌기에 아무리 여당이 비호한다 해도 불거진 의혹을 묻고 넘어갈 수는 없다. 한 번에 수천만 원에 이르는 정부 보조금까지 0원으로 처리하는 등 공시에 누락된 정대협·정의연의 기부금·보조금 규모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무려 37억원이라고 한다. 백번 양보해 실수라 해도 이 정도로 불투명하게 단체를 운영한 걸 용납하긴 어렵다.

개인 통장은 또 다른 얘기다. 윤 당선인은 2013년 한 기부금 계좌를 본인 명의에서 정대협 명의로 바꾸면서 “그것이 투명하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그 시절에 이미 개인 계좌를 활용한 기부금 모금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줄곧 개인 계좌로 기부금을 받으면서 내역 공개는 거부하니 의혹이 잦아들 수가 없다. 실제로 윤 당선인 부부가 최근 5년 치로 납부한 소득세는 643만원에 불과하다. 별다른 상속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파트를 살 때마다 수억 원의 뭉칫돈을 전액 현금으로 내고, 또 딸을 미국 유학 보내고도 현재 3억원 넘는 예금을 갖고 있으니 누구라도 출처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기부금 유용 의혹보다 더 나쁜 건 자신들 뜻을 따르지 않는 할머니들은 가혹하게 배제했다는 점이다. 심미자 할머니는 물론 심 할머니와 함께 윤미향의 정대협에 반기를 들었던 박복순 할머니의 이름은 정대협이 일제 만행을 망각하지 말고 기억하자며 조성한 ‘기억의 터’ 조형물에선 찾아볼 수 없다. 고의로 두 할머니를 배제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청와대가 두둔하는 모양새를 보이니 여당 인사들은 호위무사를 자청한다. 김두관 의원과 송영길 의원은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신 친일세력”이라고 규정하며 적반하장격으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라”고 호통까지 친다. 친여 유명인들이라고 다르지 않다. 자기편 아닌 사람들이 할머니를 욕보이는듯한 말만 꺼내도 사회적 매장을 했을 사람들이 윤미향 하나 살리겠다고 할머니를 모욕하는 것도 서슴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조국 사태에 이어 스스로를 ‘진보’라 칭하는 좌파 수구세력들의 민낯이 다시 한번 이렇게 까발려진다.

윤 당선인이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의 희망대로 결국 국회에 입성하게 될 지, 낙마할 지 모르겠다. 다만 만약 입성한다 해도 그게 결코 윤 당선인이나 민주당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두고두고 독이 될 게 분명하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데 윤 당선인 본인과 여권만 그걸 모르는 모양이다.

유난히 무능한 야당을 둔 덕에 민주당은 야당 복만 믿고 20년, 30년, 아니 100년 집권을 꿈꾸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편이라고 적당히 부정을 덮어주며 국회의원 배지 달아주는 식의 오만을 계속 부리다간 결국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일찍이 도덕경에서 말하지 않았나.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긴 듯하면서도 죄 있는 자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윤 당선인이 누구를 대표하는지 알 수도 없는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다면 지금 당장은 하늘의 그물이 너무 성긴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하늘의 그물에 다 걸리게 돼 있다. 윤 당선인도, 민주당도.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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