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소신-이미경 >"성폭력, 갑자기 나타난 괴물 아닌 권력관계에서 일어나"

박준희 기자 2020. 5. 2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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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상담소 회의실에서 문화일보와 만나 주요 성폭력·성범죄 사건에 관한 피해자 보호 방안 및 상담소의 역할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선규 기자

■ ‘30년간 피해자 보호 앞장’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

“우월적 지위에 따른 권력 악용

n번방도 약점잡아 협박 힘 작용

피해자 비난 잘못된 사회학습

20년 흘렀는데 후유증 고통도

성폭력 예방의 기본은 평등함

피해자 95% 女… 성평등 시급

일상속 언어·태도부터 바꿔야”

1991년 4월 13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23.1㎡(7평)짜리 월세 오피스텔, 활동비 20만 원.

약 30년 전이라고는 해도 한 단체의 활동 여건치고는 지금 봐도 열악하다. 총무로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시작을 함께한 이미경(60) 소장이 기억하는 상담소 초기의 활동 환경은 이랬다. 남녀평등이나 ‘여권(女權)신장’이란 말을 내세우면 유난스럽다는 눈초리를 받던 당시의 열약한 여성 인권과 왠지 비슷한 맥락이었다. 지금은 여러 후원과 도움이 모여 서울 마포구에 4층짜리 건물을 마련, 부설연구소인 ‘울림’과 근처에 성폭력피해자쉼터인 ‘열림터’를 갖춘 상담소가 됐지만 그간 상담소가 거쳐온 세월과 과정은 올해 환갑을 맞은 이 소장의 표정에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지난 12일 마포구의 상담소 사무실에서 문화일보와 만난 이 소장은 “이렇게 상담소 활동을 오래 할지 몰랐다”면서도 “그만큼 정말 매력적인 현장”이라고 말했다.

대학 학부에서 행정학을 전공했던 이 소장은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다가 성폭력 상담 활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됐다고 한다. 이 소장은 “석사 공부를 하고 여성학 강사로 강의하다 보니 한국사회에 성폭력상담소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며 “당시 ‘한국여성의전화’나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의 단체들이 먼저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덕분에 우리는 성폭력만을 전담하는 상담소를 열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90년 8월 상담소 개설 준비가 시작되고 이듬해 이 소장이 총무를 맡아 처음 상담소가 문을 열었을 때 초대 소장은 최영애 현 국가인권위원장이었다.

이 소장은 “여성학이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르게 세우는 사회 변화를 만들어가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점에서 대학 강의도 중요한 운동이지만 운동 현장에서 호흡하는 것도 의미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상담소의 이력과 역할 등에 대해 활발한 표정으로 설명하던 이 소장의 표정이 최근 벌어진 성폭력·성범죄 사건 현안에 대한 질문에서는 극히 심각해졌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운영된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아직 상담소가 공들인 만큼은 우리 사회 내의 성폭력 문제가 나아지지 않았다는 방증이었다. 최근 벌어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성추행 사건과 성착취 음란물이 제작·유통된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은 여전히 이 소장의 고민을 깊게 만들고 있다.

이 소장은 직장 내 상급자가 직원에게 성폭력을 가한 오 전 시장 사건에 대해 “성폭력이라고 하는 것은 권력관계에서 일어난다”며 “성폭력은 직장 내에서만이 아니라 누군가 힘을 더 가진 사람이 자기보다 덜 한 사람에게 자신의 자원을 활용해서 악용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오 전 시장이나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은 평소 자신도 모르게 몸에 체화된 권력을 아랫사람에게 함부로 행사하다가 일어난 성폭력”이라며 “대학 등 학생과 선생님 사이에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특히 직장 같은 조직 내에서 권력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성폭력은 피해자가 대처하기 더 어렵다. 이 소장은 “직장은 돈을 버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계속 꿈을 펼쳐 나가는 생활 터전이기도 한데, 이런 사실(성폭력 문제)을 제기함으로써 과연 조직 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우려하게 된다”며 “상대방이 가진 힘이나 경륜 모든 면에서 피해자들은 상대적으로 열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온라인상 비대면 관계에서 벌어진 ‘n번방’ 사건 같은 디지털 성범죄에도 권력관계가 작용하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가해자에게 디지털 성착취물 같은 ‘약점’을 잡히고 이를 유포하겠다는 협박을 당하기 시작하면 권력관계는 더 절대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소장은 “내 사진이 유포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이자 공포”라며 “약점이 잡히는 순간 우월적 지위관계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했다. 혹자는 피해자에게 ‘왜 그런 사진을 보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렇게 비정상적인 관계에 들어가면 피해자는 정상적 판단과 행동이 어려운 입장이 되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냉정한 대응을 요구할 수 없다. 이 소장은 “(메신저로) 협박하고 그런 협박과 착취가 먹힌다고 가해자가 느꼈을 때 그런 메커니즘 자체가 가해자들을 더한 괴물로 만들어 간다”며 “피해자에게 ‘왜 사진을 보냈냐’고 되묻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고 의심하는 잘못된 사회적 학습”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주목받은 사건들 외에 상담 등을 통해 겪은 안타까운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묻자, 이 소장은 “너무 많다”면서도 성폭력 사건이란 특수성상 인터뷰를 통해 풀어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기에 긴 사연을 소개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떤 분은 피해 후유증, 2차 피해로 아직도 힘들어하면서 10∼20년이 지난 지금도 전화를 하는 분이 있다”며 “그런 사건 피해자분들이 전화할 때는 가슴이 아프다”고만 했다.

성폭력·성범죄 문제가 발생하면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으로 피해자 보호가 꼽힌다. 피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거나 할 경우 2차 피해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직장 등 같은 공간에서 가해자·피해자가 생활하고 있을 때도 둘을 분리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이 같은 피해자 보호 조치에서는 ‘피해자의 입장 존중’과 ‘신속하고 합리적인 해결 과정’의 균형이 필요하다는 게 이 소장의 설명이다. 이 소장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공간적 분리가 어려운 소규모 직장 내 성폭력 발생 시에 “피해자가 원한다면 피해자에게 휴가를 줄 필요가 있고, ‘내가 왜 쉬냐? 가해자가 쉬어야 한다’고 요청할 땐 피해자 의사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며 “그리고 빠른 시간 내에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피해자는 2차 피해에 노출되기 때문에 직장의 책임자가 되도록 빨리 절차를 거쳐 성희롱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고 이에 대한 징계 여부를 신속하게 진행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말했다.

성폭력 문제에 관한 일을 오래 해온 이 소장에게는 이처럼 성폭력 발생·대응·예방 등에 관한 깨달음이 있었다. 그는 “제가 운동하며 느낀 것 중 몇 가지를 말하면 성폭력은 괴물, 갑자기 나타난 무지막지한 괴물에 의해 저질러지는 게 아니라는 게 통계로 확인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처음부터 폭행·협박으로 성폭력을 가하기보다 정말 교묘하게 자신의 권력, 권위를 이용해서 피해자들도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범죄가 일어난다”며 “그런 면에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 어떤 언어와 호칭을 쓸 것인지에 따라 피해자는 위압감으로 느끼게 된다”고 분석했다. 성폭력 예방의 기본은 “평등함”이라고 강조한 이 소장은 “남녀 간 95%의 피해자가 여자라는 점에서 남녀 성평등 세상을 만들어야 이런 성폭력도 줄어들 수 있다”고 말했다 .

지난 2002∼2009년 한 차례 소장을 지낸 후 대학에서 논문을 쓰고 강의하다가 2015년에 다시 소장으로 돌아왔던 이 소장은 내년 1월에 임기가 끝난다. 이 소장은 이후 어떤 활동을 할지도 구상하고 있다. 선배 활동가로서 운동의 역사, 그동안 상담소가 해온 고민을 정리하는 작업이나 연구를 우선적 계획으로 꼽고 있다.

이 소장은 “활동가로서의 일상은 상담 신청이 오면 달려가고, 상담하다 보면 그동안의 고민, 쟁점, 활동의 흔적을 기록하는 걸 많이 놓치게 된다”며 “성폭력을 상담하면서 우리가 느낀 고민을 정리하는 작업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반성폭력운동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그간 발생한 사건들의 일지를 분석해 보면 그게 곧 우리 사회의 변화이고 사회 병폐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데 그런 활동에 대한 지원은 많지 않다”며 “우리가 연구해야 현황을 파악하고 기반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간 활동가로서의 삶에 대해 “우리 사회의 맥박인 NGO 활동가로서 커다란 자긍심을 갖고 살아올 수 있었다”며 “참 행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덧붙였다.

박준희·나주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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