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재난 '기부금'의 용처

양선희 2020. 5. 2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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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지원금은 지역경제 돌리기 용도
기부받아 보험기금에 쌓는 건 난센스
차라리 전염병 창궐시대를 대비하는
건강인프라 투자 등 창의성 발휘해야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헐~’. 정부가 전 국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겠다면서 동시에 ‘기부’하라고 제안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이거였다. 나는 ‘현금도 풀고, 돈 쓸 궁리도 하자’(중앙SUNDAY 2020년 3월 21일자 31면)는 지난 칼럼에서 “성금 말고 특별세금 100만원 자원납부자를 모집한다면, 자원하겠다.”고 썼다.

한데 이번 재난지원금을 받느냐를 놓고 짧고 깊게 생각한 끝에 모두 받았다. 그리고 지금 동네방네에 다니며 쓰고 있다. 대신 그 금액 이상을 국가가 아니라 진짜 기부가 필요한 단체에 기부했다. 일단은 국가가 재난지원금까지 풀어야 했던 원초적 이유 때문이다.

소비를 유도해 지역 경제에 숨통을 틔우겠다는 이유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소비가 미덕’인 시절. 그것도 동네 문방구, 분식점 등 구석구석에 있는 영세 상공인의 점포에 돈을 집중적으로 풀어야 할 때라는 말이다. 그러니 받아서 열심히 써주는 게 맞다. 굳이 기부해야 한다면 그 돈을 절실히 필요한 단체에 기부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또 재난지원금을 받아서 쓰면 부가가치세를 더 낼 수 있고, 받은 금액만큼 소득에 합산돼 연말에 세금을 더 낼 테니 국가 재정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하나 재난지원금을 받을 생각이 별로 없었던 내가 굳이 받는 쪽으로 ‘삐딱선’을 탄 이유는, 실은 순전히 기분 탓이었다. ‘기부’를 유도하는 정부의 행위가 과거 군부 정권 시절, 수시로 강요됐던 ‘자발적 성금의 추억’을 끌어냈기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굳이 ‘성금 말고…’라는 표현을 썼을 정도로 우리 학창 시절의 성금 강요는 지금까지 불쾌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선데이 칼럼 5/23
내 학창시절은 오롯이 유신 시절부터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던 탓에 틈만 나면 100원, 500원 하는 식의 성금을 걷는 일이 많았다. 말은 자발적이었지만 그 성금이 다 걷힐 때까지 매일 낸 사람과 안 낸 사람을 체크했다. 강요된 자발성으로, 못 내는 어린 학생들이 당했을 당혹과 모멸감에 대해서 국가는 무관심했다. 20여 년 전 ‘조 단위의 통치자금’을 각계에서 모금했던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을 취재하면서도 내겐 이 성금의 기억이 떠올랐었다.

국가는 국민에게서 세금을 걷거나 국채를 발행하는 등 정상적으로 돈을 끌어모을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기부를 받고, 성금을 모으는 건 정상적인 국가가 할 일은 아니다. 강제할 수단이 없는, 사람들의 선의에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공익단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기부의 영역에 국가가 치고 들어오는 것은 반칙으로 보인다. 만일 이번에 재정 건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재난 국채’를 발행했다면, 과거 ‘애국 국채’를 샀던 마음으로 돌려받기를 포기하고 사들이는 사람들도 꽤 됐을 거다.

이번 기부금은 고용보험기금으로 편입된단다. 현금의 유동성을 높이기 위해 돈을 풀면서 굳이 기부를 받아 쌓아두겠다? 게다가 실업급여 지급액이 지난 4월 한 달 동안 1조원에 육박하는 등 고용보험기금 고갈 우려가 커지고 있다는 뉘앙스를 슬쩍슬쩍 흘린다. 만일 정말로 이 정도의 위기에 기금 고갈이 우려되는 상황이라면, 지금 그 기금 운용이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다는 얘기다. 당장 감사를 하든지 해서라도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그럼에도 한국 국민은 우직하다. ‘재난지원금’인지 ‘재난기부금’인지 헷갈릴 정도로 부지런히 기부를 한다. 언론에선 이런 ‘기부 미담’을 매일 퍼 나른다. 이게 한국인의 충정이니 또 어쩌겠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모인 기부금을 고용보험기금에 편입하는 게 최선일까. 고용보험기금엔 어차피 기업과 근로자들이 피땀 흘려 번 돈으로 보험료를 꼬박꼬박 내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도 계속 낼 것이고.

어차피 걷힌 기부금이라면 국민의 생활을 업그레이드하는 용도로 활용할 수 있도록 창의성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전염병의 확산은 앞으로도 반복될 거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다. 차라리 기부금으로 이런 시대를 잘 살아남기 위한 건강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쓰는 건 어떨까.

최근 VR(가상현실)을 전공하는 컴퓨터공학과 교수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우리나라 IT 기술이면 생활에서 직관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건강 및 방역’프로그램을 쉽게 만들 수 있단다. 게임이나 군사훈련 등에 사용하는 시뮬레이션 기술을 활용해 개인의 신체조건, 질병 등에 따라 각각의 생활공간에서의 안전과 방역 지침을 평소에 게임처럼 가상현실훈련을 할 수도 있다. GPS와 연동해 놓으면 자신이 지하철, 식당, 백화점, 교회 등 다중 이용 장소로 갈 때 특히 주의해야 할 안전 수칙을 미리 통보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근로자들이 전염병이나 질병을 견딜 수 있도록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직장 건강 경영’ 환경 만들기에 투자하는 방법도 있다. 지난해부터 중앙SUNDAY가 서울대 의대와 함께 하고 있는 ‘건강경영운동’은 지금 코로나19 사태로 잠시 유보되고 있지만, 이번 사태로 하나의 확신이 생겼다. 전염병 위기 시대에 우리 경제가 지탱하는 힘은 근로자의 건강을 지켜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말이다. 어쨌든 국가가 모금한 재원으로 건강과 경제를 동시에 지키는 창의성을 발휘해 주기를 바란다.

양선희 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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