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보물 527호 김홍도 풍속화첩, 김홍도가 그리지 않았다"

노형석 2020. 5. 2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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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
회화사학계 권위자
장진성 서울대 교수도
신간 '단원..진실'에서 피력

"단원이 남긴 명작은
모두 병풍 그림
그를 풍속화가로 평가하는 건
폄하, 아니 모독이다"
지난 6일부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상설관 2층 서화실에서 선보이고 있는 <단원 풍속도첩>(국가보물)의 그림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씨름>이 앞머리에 보인다. 전시장에서는 <씨름> 외에 <무동> <논갈이> <활쏘기> <노중 풍경> <베짜기> <그림 감상>을 구경할 수 있다.

‘단원 김홍도를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가장 한국적인 풍속화가로 평가하는 것은 그의 가치를 폄하, 아니 모독하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국내 회화사학계의 권위자로 꼽히는 장진성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가 곧 나올 신간 <단원 김홍도―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사회평론)의 맺음말에 쓴 일갈은 충격적이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그는 더욱 거센 필치로 상식을 건드린다. “우리는 오랫동안 김홍도를 씨름과 서당 장면을 그린 화가로 생각해왔다. 이것은 치명적인 대중적 오해이다. 그는 여전히 대중적 오해의 굴레 속에 갇혀 있다.”

가장 조선적인 화가로 통하는 단원이 풍속화의 대가라는 건 한국인들의 당연한 상식이다. 장 교수는 <씨름> <무동> <서당> 같은 명작들로 익숙한 거장의 업적을 평가절하하겠다는 것일까. 물론 아니다. 책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풍속화가 아닌 여러 폭에 그린 병풍화다. 조선 왕실의 그림 관청 도화서에서 화원으로 일하면서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단원은 풍속도는 물론 인물, 산수, 도석, 꽃, 과일, 동물, 곤충, 물고기 등 모든 그림 분야에서 빼어났던 불세출의 천재였다. 선조 중에 전혀 화가가 없었던 중인 무반 집안 출신으로 천재적 소질과 노력으로 당대 최고 화가 반열에 올랐다. 이런 단원의 재능과 성가가 가장 절묘하게 발현되었고, 초기부터 노년기까지 줄곧 제작에 몰두하고 새로운 실험적 구도와 기법을 개발한 무대는 바로 병풍화였음을 장 교수는 신간에서 조목조목 입증한다. <군선도> <행려풍속도> <삼공불환도> 등 단원이 남긴 명작은 모두 병풍 그림이며 왕실 그림이든 풍속화든 세부 그림들을 두루 포괄한 대표 장르 또한 병풍화였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단원에 얽힌 미술사의 진실을 바로 봐야 한다고 역설한다. 풍속화를 포함한 당대 모든 그림 장르를 포괄해 그린 병풍화의 대가로서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동아시아 화단에서 중국과 일본 화가들조차 대적할 이가 없었던, 거장 중의 거장이 김홍도의 생애와 예술에 관한 역사적 진실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단원 풍속도첩>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동>(춤추는 소년).

그렇다면 단원의 풍속화는 어떻게 봐야 하는가? 50년 전 보물 527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 <단원 풍속도첩(속화첩)>은 단원을 가장 조선적인 풍속화의 대가로 대중에게 자리매김시켰다. 실제로 이 도첩에 실린 <씨름> <무동> 등의 이미지들은 민속주점에까지 등장하는 국민 그림이다. 장 교수는 지금까지 단원의 것으로 알려진 이 풍속도첩을 진작이 아니면서 거장의 역량과 업적을 왜곡시킨 문제의 본산으로 겨냥한다. 단원의 진작으로 인정되는 <행려풍속도>란 병풍화에 실린 풍속도와 도상과 필치, 배경이 일부 일치한다는 이유로 풍속도첩 그림들이 진작으로 인정받으면서 단원을 풍속화가로 고착시키는 편향이 일어났다는 말이다.

실제로 도첩의 그림들에 대해 학계 전문가들은 고개를 가로젓는 이들이 많다. 그림 전체 또는 상당수가 단원의 진작이 아니며, 단원과 긍재 김득신의 화풍을 19세기 후대 기량이 떨어지는 화가들이 베껴 그려 단원 것처럼 유통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도 나왔다. 풍속도첩은 국립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박물관이 1918년 조한준이라는 골동품상한테서 샀는데, 세부적으로 단원 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입증되는 근거는 단원이라는 한자 호를 새긴 도장을 13폭의 그림들에 찍은 것이 유일하다. 도장의 문양, 도장을 찍은 위치나 지질 등을 분석해보면 후대에 조잡하게 찍은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거의 똑같은 구도로 그려졌으나 화가의 이름만 다른 모작본이 미국과 영국에 팔려 현전하고 있다는 사실도 의구심을 더하게 한다. 첩에 실린 그림들 가운데 <씨름>과 <무동>의 구경꾼과 악사의 왼손 오른손을 바꿔 그리거나 물감이 묻고 종이가 찢기고 밀리는 등의 훼손 흔적이 많은 것들도 진작이 아닌 후대 교본용 화보였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강관식 한성대 교수는 실제로 이런 부분들을 일일이 고증하면서 첩에 실린 그림 모두가 단원 것이 아니라는 견해를 2012년 논문을 내어 처음 공론화하기도 했다.

<노중 풍경>(길가 풍경). 전시에 선보이는 <단원 풍속도첩> 수록 작품이다.

지난 100년간 이 도첩이 절대적인 진작으로 인식되면서 단원을 대표하는 명작이 된 까닭은 뭘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소장됐을 때부터 이 도첩은 <조선고적도보>에 4점이 실려 단원의 명품으로 소개되면서 단원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조선의 문화재들을 문화통치를 위한 효율적 수단으로 생각했던 일제 당국자들은 조선의 봉건적 풍경, 조선인들의 낙후한 생활상을 비교해 보여줄 수 있는 생생한 사료로 활용했다. 해방 뒤엔 전혀 다른 민족주의적 맥락에서 그림이 재해석되는 양상을 맞게 된다. 덕수궁 석조전 시절과 경복궁 박물관 시절 숱한 국내외 전시에 출품되고 교과서에도 실리면서 18세기 근대적 면모를 보이던 조선 사회의 풍경을 상징하는 단원의 절대 명품으로 이미지가 굳어져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몰아친 전통문화 재조명 열풍 속에서 풍속도첩의 대표작들이 각종 행사, 시설들의 간판, 홍보물 이미지로 더욱 널리 쓰인 것도 이런 흐름을 가속화했다.

단원의 유명한 병풍 그림 중 하나인 <행려풍속도>의 일부 화폭인 ‘노중 풍경’. <단원 풍속도첩>의 일부인 <노중 풍경>과 그림 속 장면이 비슷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단원 풍속도첩’의 옛 표지. 유물번호(114번)을 표기하고 ‘단원 김홍도 필 풍속화첩 조선총독부박물관’이란 명칭과 소장처를 함께 적은 표찰이 표지 아래 오른쪽에 붙어있다. 풍속도첩은 1918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조한준으로부터 구입했을 당시엔 그림 27점이 들어있었으나 1957년 화첩의 앞 뒤에 있었던 <군선도> 2점을 별도의 족자로 떼내면서 현재는 25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한말 골동품상에 의해 명확한 근거도 없이 김홍도 작으로 인정받은 <단원 풍속도첩>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해 편견이 깊어져온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불편하지만, 전문가들이 역량을 모아 도첩에 얽힌 진실을 하나하나 규명하고, 오해를 풀어주는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 되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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