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연의 시시각각] 세상 바뀐 것 조금도 모르겠다

최상연 2020. 5. 29.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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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검찰 개혁 정말 해내려면
깨끗한 손 내세워야 공감 얻어
'윤미향 굴복 말라'론 못 바꾼다
최상연 논설위원

매일 아침저녁, 지하철역 앞에 내걸린 대형 플래카드 문구를 읽으며 출퇴근한다. ‘일본 극우, 토착 왜구 합작품. 윤미향과 정의기억연대 죽이기’란 꽤 큰 글자다. 한동안 ‘조국 수사는 검찰 쿠데타’란 배너가 걸렸던 자리다. 이게 바로 윤미향 사건의 황당하고 맹랑한 점이다. 의혹 제기가 친일파 공세란 건데, 그러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친일파란 얘기가 된다.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윤미향 당선인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복마전을 방불케 하는 의혹들이 차고 넘치게 부풀었다. 자고 나면 새 의혹과 앞뒤 안 맞는 변명이 늘어난다. 단순 회계 부실이나 실수가 아니라고 보는 국민이 대부분이다. 이쯤 되면 사과하고 정리하는 게 상식인데 그냥 ‘조국 사태 시즌2’로 달려가는 중이다. ‘독립운동하는 데 군자금 따지는 격’이란 궤변으로 뭉개고, 위력을 과시하는 ‘윤미향 수호대’다. 집권당 대표는 “신상털기, 옥죄기에 굴복해선 안 된다”고 오히려 성을 냈다. 판박이다. 세상 바뀐 걸 모르겠다.

얼마 전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졌을 때만 해도 당은 양정숙 비례대표 당선인을 즉각 제명했다. 조국과 윤미향은 끝까지 뻗댄다. 아마도 이 정권이 사활을 걸고 있는 반일 내지 반미 민족주의 운동과 검찰 개혁에서 두 사람은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압수수색이 이뤄졌다는 건 관련 범죄 혐의가 소명돼 법원이 수사 필요성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여당에선 “검찰이 굉장히 급속하게 압수수색을 해 아쉽다”는 겁박이 나온다. 지지층만 결집하면 그 힘으로 그냥 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조국이 만든 분노는 총선에 별 영향을 못 줬다. 거기까진 그렇다. 문제는 이런 오만과 안하무인이 만드는 검찰 개혁과 반일 민족주의에 과연 어떤 공감이 생기겠느냐는 거다. 윤미향도, 양정숙도 내일이면 21대 의원으로 신분이 바뀐다. 선거 끝나자마자 ‘세상이 바뀌었다는 걸 확실히 느끼도록 갚아주겠다’고 호언장담한 최강욱 당선인도 마찬가지다. ‘친일파 파묘법’을 외치는 당에서, ‘적절한 시기에 윤석열 검찰총장을 고발하겠다’는 이분들은 그런 대열에 앞장설 게 분명하다.

민주당은 21대 국회에서 국회와 권력기관 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다짐하고 있다. 지당한 말씀이다. 거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사람은 지금 대한민국에 없다. 멀쩡한 사람이 국회만 들어가면 이상해진다는 나라다. 떼법과 억지가 판치는 세상이다. 멀쩡한 사람이 국회에 들어가도 이상해지지 않으려면 상식과 순리가 통하는 정치여야 한다. ‘위안부 운동을 빙자해 개인 비즈니스를 했다’고 의심받고, 권력범죄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채로 ‘적폐 청산’을 외치고 그걸 집권 세력이 옹호하는 건 상식이 아니다.

윤미향 사태도, 조국 사태도 이념이 아닌 진실 문제다. 사실을 검증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국민은 두 사람에게 남보다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사실관계부터 밝혀 달라는 최소한을 주문하는 것이다. ‘목적이 올바른데 과정이 뭐가 문제냐’는 게 해명의 전부라면, ‘적폐’로 찍혀 감옥에 간 전 정권 인사 100여 명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단 한 사람에게도 남의 편엔 그렇게 대충, 물렁물렁 넘어갔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사실관계 규명이 우선’이란 진영 엄호 속에 숨은 윤 당선인은 곧 국회의원 불체포특권의 큰 방패를 하나 더 갖게 된다. 비겁하고 무책임하며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세상 바뀐 걸 알게 해주겠다’던 세상 모습이 설마 이런 건 아닐 것이다. 집권당이라면 윤 당선인을 제명해 어떤 권력의 배경도 없이 수사받게 해야 한다. 흑백을 가리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런데도 그렇지가 않으니 세상 바뀐 걸 도무지 모르겠다는 거다. 선거 이긴 열린우리당이 정치와 국회를 이렇게 마구 어지럽히다 ‘폐족’이 됐다.

최상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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