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적을 알아야 무기를 개발하죠" 최초로 코로나 유전자지도 만들다

조유진 기자 입력 2020. 5. 30. 03:01 수정 2020. 11. 10.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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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생물학자 서울대 장혜식 교수
장혜식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과학을 하면 세계에서 아무도 몰랐던 현상이 내 앞에서 일어난다는 게 제일 재밌다. 일이 아니라 게임처럼 느껴야 오래 할 수 있다”고 했다.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적의 특성을 파악하고 ‘아킬레스건’을 공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가 발행한 '코로나19 과학 리포트'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김 교수가 이끄는 공동 연구팀은 지난달 초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의 RNA 전사체를 분석해 코로나 유전자 지도(地圖)를 최초로 공개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유전물질로 DNA가 아닌 RNA를 가지고 있다.

국제학술지 셀(Cell)에 이 지도가 실렸다. 계산생물학자 장혜식(40)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통상 6개월이 걸리는 연구를 3주로 단축했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프로그래머. 이 과학자 덕분에 대량의 RNA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었다. 지난 27일 서울대에서 장 교수를 만났다.

처음으로 코로나 지도 만들다

―지난 1월 중국 연구팀에서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전정보가 담긴 유전체 지도를 공개했는데.

"저희 연구는 전사체(세포 안에서 생산된 RNA) 지도예요. 쉽게 말하면 유전체 지도는 자동차 설계도입니다. 설계도에는 차가 어떤 모양이고 어느 부품을 썼는지 나타나지만 어떻게 움직일지 추측만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차가 어떻게 달릴지는 차를 움직여 보면서 데이터를 모아 분석해야 합니다. 바이러스를 정지화면으로 보는 게 유전체 지도라면, 숙주(사람)에 들어와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만들어내는지도 파악한 게 전사체 지도예요."

바이러스는 숙주에 침투해 다양한 전사체를 만든다. 장 교수는 전사체의 구성과 변형을 찾아냈다. 이 변형 부위를 연구하면 바이러스의 약점을 파악할 수 있다.

―보통은 6개월이 걸리는 연구입니다.

"이번엔 속도가 굉장히 중요한 특수 상황이었어요. 저희 연구단은 마침 코로나 바이러스 연구에 필요한 일을 전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프로그램과 시약도 있어서 별도의 기술 개발 없이 바로 연구에 들어가 시간을 단축했어요."

―바이러스 샘플은?

"바이러스의 대량 생산이 어려운 과정이었는데 질병관리본부(질본) 도움을 받았습니다. 질본이 2월 초 환자의 가래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뽑아 키우는 분리 동정에 성공했어요. 세계적으로도 빠른 편이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생물안전 3등급 실험실에서만 연구할 수 있는데, 서울대 캠퍼스에는 2등급 실험실뿐이라서 바이러스를 받는 것도 불법이었어요. 질본이 저희가 필요한 방식으로 바이러스를 키워 불활성화(inactivation)해 공급해준 덕에 저희 실험실에서도 다룰 수 있었습니다."

―유전자 연구에 컴퓨터 프로그래밍이 어떻게 쓰이는지 상상이 안 됩니다.

"RNA와 DNA는 컴퓨터가 이해하기 쉬운 디지털 정보에 가까워요. RNA는 염기 4개(A, C, G, U)가 구슬을 꿰듯 이어지는데, 염기가 조합된 서열이 유전 정보가 됩니다. 그 정보를 컴퓨터 파일로 옮겨 패턴을 분석해요. 수백만 개에서 수억 개까지 분석하려면 프로그래밍으로 자동화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김빛내리·장혜식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연구팀이 셀(Cell)에 코로나 바이러스 유전자 지도를 발표했다.

미래가 두려워 생물 공부 시작

―세계가 코로나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자와 의학·역학 전문가뿐 아니라 물리학자, 의료장비를 연구하는 기계·전자공학자까지 참여하고 있어요.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이렇게 하나의 주제에 몰입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에요. 세계가 한 연구실처럼 협력하고 있어요."

―어떻게 협력하나요.

"요즘 생물학 연구는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려요.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데이터가 노출되는 건 정말 위험하죠. 그런데 코로나 연구는 흐름이 아주 빨라요. 예전엔 연구 결과라는 나무가 다 자라야 팔았다면 지금은 잎사귀 하나, 가지 하나를 키워도 결과를 내놓거든요. 그걸 다 모아보면 조금씩 그림이 맞춰져 한 그루의 나무가 되는 식이에요."

―공대생이 생물 공부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20년 전쯤 생명공학의 발전에 두려움을 느꼈어요. 인간 복제가 현실화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텐데, 미래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겠구나. 생물학 테러처럼 내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공격당하면 어떡하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릴 때 어떻게 고치고 어떻게 정보가 유출되는지는 파악하고 있지만, 생물학에 대해선 전혀 몰랐기 때문에 호기심이 생겼어요."

―지금은 미래가 덜 무섭나요.

"생물학에 대해 알게 돼 어떤 미래는 가능하고 어떤 상상은 불가능한지 가늠할 수 있어요. 공포가 훨씬 줄었지요. 인간 복제처럼 실현 가능해도 경제성은 떨어져 아무도 안 할 것 같은 일도 있고요."

―무지(無知)가 두려움을 낳기도 하지요.

"잘 모르는 원리로 돌아가는 기계를 볼 때 저는 무서워요. 원리를 모르는 약은 불안해서 잘 안 먹죠. 컴퓨터든 약이든 어지간하면 원리를 알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이번에 완성한 지도가 코로나에 대한 공포를 줄여줄 것 같습니다.

"지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약이 완성된다거나 바이러스를 없앨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무엇이든 시도해 보려면 이 지도가 필요해요. 동물원에서 지도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지만, 동물원의 숨겨진 곳까지 다 알진 못하잖아요. 마구 돌아다니다가 폐장 시간이 될 수도 있고(웃음)."

아들 셋 아빠는 두려울 게 없다

―프로그래밍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디스켓이라고 아세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옆 친구들이 빨주노초파남보 컬러 디스켓 세트를 갖고 있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컴퓨터학원에서 준다'고 하더라고요. 디스켓을 받고는 학원 컴퓨터에 앉아 '컴퓨터야, 안녕'이라고 타자한 게 기억나요."

―20년 전 드라마 '카이스트'에 나온 공대생처럼 대학을 다녔다고요?

"로봇 제작 동아리에서 기계를 만들고 코딩을 했어요. 98학번인 제가 대학을 다닐 때는 닷컴 버블이 부풀어오르던 시기라 공대 분위기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어요. 세계 프로그래머들이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했지요. 대학생 신분으로 IT 회사에 컨설팅도 했어요."

―유학 없이 공부부터 연구까지 다 해결했더군요.

"미국은 학회 때만 가봤어요. 박사 학위를 받고 외국에 나가 일을 할까 고민했는데, 아이가 둘이나 태어났지요. 아이들을 두고 다녀오면 '3년 안에 무조건 성공해 돌아와야 한다'는 시간제한도 싫었어요. (아이들이 몇 살인지 묻자) 2014년, 2016년, 2018년생 아들만 셋입니다(웃음). 아직 말을 못하는 막내 빼고 첫째랑 둘째는 생물학자가 되겠대요."

―아버지가 멋있어 보였나 봅니다.

"제 영향은 아닌 것 같아요. 열심히 보는 BBC 애니메이션 '옥토넛'에 해양생물학자가 나와요."

―연구하지 않을 땐 뭘 하나요.

"저는 '덕업일치'예요. 데이터 분석이 취미고. 사람들이 일요일에만 자꾸 비가 오는 것 같다고 하면 정말 일요일에 비가 많이 오는지 분석해봐요. '이름만 들으면 그 사람이 몇 년생인지 알 수 있을까?' '교회에 가면 여자친구가 생긴다는데 사실일까?' 같은 궁금증도 인구 통계로 분석해요. 쓸데없지만 재밌잖아요."

코로나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힌 과학자에게 ‘이제 무엇이 두려우냐’고 물었다. “지금은 아무래도 아내가 화를 내면 좀 무섭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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