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귀국 지원' 김원동씨 "할머니들 원한 품고 돌아가시게 해선 안 돼..정부가 더 적극 나서야"

전현진 기자 2020. 5. 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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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서울 중구 모처에서 만난 위안부 귀국 지원 활동가 김원동씨가 중국에 거주하던 고 정학수 할머니의 귀국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1993년 12월 중국 장쑤성 난징에서 처음 만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고 정학수 할머니는 김원동씨(75)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정 할머니와 만난 건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김씨는 사업차 방문한 난징에서 교회를 찾았고, 그곳에서 만난 한국 유학생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인 정 할머니가 어렵게 살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됐다.

정 할머니는 난징 시내에서도 14시간 넘게 가야 하는 시골 마을 초라한 움막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14세 때 위안부로 끌려가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정신착란에 시달리고 있다는 정 할머니의 사연이 현지 매체에 소개돼 한인 유학생들 사이에서 모금운동도 벌어졌다. 그러던 중 중국을 방문한 김씨와 인연이 닿은 것이다. “고향 땅에 가서 죽고 싶다.” 할머니의 소원이었다. 무역업을 하며 선교 활동을 하려던 김씨는 정 할머니의 귀국을 돕기로 마음먹었다. ‘비행기표 한 장 더 사서 모시고 가면 되겠지’ 했던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정 할머니는 여권은 당연히 없었고, 국적도 불분명했다. 신분증에는 출신지가 ‘조선’으로 나와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의 조선을 가리킨 말이지만, 중국에서는 북한을 통칭하던 시절이었다. 한국어도 잊고 의사소통이 편치 않아 자신의 이름도 명확히 말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성이 ‘전’인지, ‘정’인지도 분명치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씨는 우선 경주 감포읍이 고향이라는 말만 듣고 정 할머니의 가족을 찾아봤다. ‘정신대로 끌려가 행방불명된 사람이 있지 않냐’고 물어도 많은 이들이 모른 척했다. 위안부와 정신대가 혼용되던 때였고, 피해자들과 그들 가족은 그 이력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김씨는 아내와 발품을 팔아 가까스로 정 할머니의 친척과 호적을 찾았다.

1994년 6월10일 정 할머니는 어렵게 임시 여행증명서를 받아 일시 고국을 방문했다. 영구 귀국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할머니가 언제 사망할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컸다.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언론에서도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는 등 정 할머니에게 관심을 보였다. 짧은 일정을 마치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갈 때 할머니는 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정 할머니는 그 후 국적을 회복하고 1996년 3월 영구 귀국했다. 고향 감포읍으로 돌아가 주민등록을 신청했다. 오래지 않아 투병 생활을 시작했고, 1998년 3월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향에서 죽고 싶다’는 할머니들 소원

1990년대부터 중국 전역 누비며
13명 찾아내 6명 국내 정착 도와
한때 횡령 누명 소송 고초 겪기도

정 할머니와 만난 이후 김씨는 본업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귀국 지원에 더 매진했다. 기존 우즈베키스탄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많이 머물고 있는 중국으로 사업의 중심도 옮겼다. 정 할머니의 소식이 알려진 뒤 중국 곳곳에서 연락이 왔다. ‘김씨를 만나면 고향에 갈 수 있다’는 기대로 몇몇 위안부 피해자들이 손을 뻗었다. 별다른 모금 활동을 벌이지 않고 그가 사업에서 얻은 수입으로 할머니들의 귀국을 준비했다.

우한에서 지낸 고 하상숙 할머니와 연이 닿은 것도 정 할머니와 만난 직후의 일이다. 1996년 9월 우한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7~8명이 어울려 지냈는데, 하 할머니가 그곳 할머니들의 ‘리더’ 역할을 했다. 김씨는 할머니들의 귀국 준비로 서너 달에 한두 번씩 우한을 방문했다. 갈 때마다 된장, 고추장, 누룽지사탕 같은 먹거리를 싸갔고, 용돈도 따로 챙겼다.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위안부 피해자 13명을 찾아냈고, 귀국을 도운 게 6명이었다. 중국에서 지내는 위안부 피해자들은 저마다 안타까운 사정이 있었다. 위안부로 지낸 세월도 끔찍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중국에 남아 지낸 세월도 참혹했다. 어렵게 결혼을 했어도 가정폭력에 시달리거나,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치매 등의 질환을 앓는 이들이 많았다.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숨을 거두는 이도 여럿이었다. 김씨는 타지에서 유명을 달리하는 피해자 할머니들을 보며 무력감을 느꼈다고 했다. 발을 씻겨드리며 “할머니 꼭 고향에 묻어드릴게” 약속하는 게 고작이었다.

2018년 별세한 이귀녀 할머니와의 인연도 그렇게 이어지게 됐다. 이 할머니는 2001년부터 김씨의 도움으로 한국을 오갔다. 중국에서 만난 남편의 건강 문제로 한국에 정착하지 못하다, 2010년 사별 후 김씨에게 연락해 한국에 정착했다.

이 할머니는 김씨 집에서 머물다 치매를 앓으며 요양병원에 들어갔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김씨와 그의 가족이 간병을 했다.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할머니를 돌보다 김씨는 오른팔 힘줄이 끊어지기도 했다.

■문제 해결 위해 일본과 친해져야

“일본의 양심세력 설득하려면
일본과 친해져야 사과·배상 기대
반일 감정에 이끌린 활동은 멈춰야

지난 26일 오후 서울 중구의 모처에서 김씨와 4시간 넘게 인터뷰를 했다. 할머니들과 함께한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회한이 가득했다. 이 할머니의 지원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김씨는 최근 2심 재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그는 “제게 돌을 던진 이들을 축복하고 용서하려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까지의 위안부 지원 활동을 돌아보며 정부정책의 허점을 지적했다. “위안부 피해자를 돕는 개인이나 단체가 있다는 전제하에 정부의 피해자 지원이 이뤄져 많은 것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주거·생활 지원도 쉼터에서 생활하거나 병원을 오가는 보호자가 있다는 전제로 이뤄진다”며 “정부에서는 재정적인 지원만 할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씨는 “할머니들을 모시고 왔을 때 빌라 두 채를 구입해서 지내도록 해드린 적이 있었다. 되도록 한 집에 두 분 넘게 거주하시지 않도록 했다. 널찍한 곳 하나를 마련해 비슷한 처지의 할머니들이 모여 살게 하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할머니들에게 정말 필요한 건 소소하지만 자유를 느껴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직접 자기 집 문을 열고,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도 보고, 먹고 싶은 거 해먹으면서 가끔씩 친구들을 불러 함께 노는 그런 자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평생을 자유 없이 지낸 분들이니 그런 작은 것도 소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도 밝혔다. “반일 감정과 원한에 이끌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김씨는 “사람들이 저에게 돌을 던지겠지만, 일본과 친해지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그들과 친해져야 일본의 양심세력을 설득할 수도 있고, 할머니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하도록 설득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때 김씨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함께 위안부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정대협으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했다. 김씨와 정대협의 운동 방향이 갈린 건 박근혜 정부 당시 ‘위안부 문제 한·일 합의’ 이후다. 사과와 배상이 선행돼야 한다고 요구하는 정대협 등의 단체들은 당시 이를 “굴욕 외교”라며 비판했다.

김씨는 위안부운동 단체가 말하는 ‘사과와 배상’이 과연 어떤 모습인지 이성적으로 들여다봐야한다고 했다. “결국 일본의 총리가 한국으로 와 무릎 꿇고 사과하고, 일본의 모든 국민이 이 사과에 토를 달지 않는 그런 이상적인 사과의 그림은 원한을 앞세운 반일 감정으로는 이룰 수 없는 목표”라고 그는 주장했다. “한국에서도 정부정책에 찬반으로 의견이 갈리기도 하는데, 일사불란하게 일본이 사과하길 바라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피해자 ‘용기 있는 고백’ 공론화
‘위안부 합의’ 일정 성과 인정해야
제대로 된 역사 교육 집중했으면”

김씨는 위안부 문제 합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었다. 많이 미흡하지만, 민간에 책임을 떠넘기지 않고 일본 정부의 사과를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공론화하면서 오랫동안 이어진 운동의 성과라고 인정해야 한다”는 그는 “부족하지만,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두 나라 시민들이 위안부의 역사에 대해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원금과 배상금의 성격을 두고 의견이 갈린 부분에 대해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도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들이 원한을 품고 돌아가시게 해서는 안 된다. 위안부의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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