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 '30만원' 알바의 함정

반기웅 기자 2020. 5. 3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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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익 일감 내세워 차 매입 유도… 사기죄로 고소해도 피해 회복 어려워


취업 사이트를 훑다 눈길이 멈췄다. ‘일당 30만원’ 수행기사 채용공고였다. 단가는 센 반면 지원 장벽이 낮았다. 운전면허가 유일한 지원 요건이었다. 초기 비용이 없고 ‘편하게 오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근무시간은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수행기사로 하루 운행을 마치면 당일 저녁에 30만원이 통장에 꽂힌다. 여기에 유류비·식대까지 제공되는 괜찮은 일자리였다. 한 달에 보름만 일해도 450만 원의 순수익이 생기는 셈이다.

온라인으로 지원했더니 10분 만에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채용공고상 근무지는 인천공항이었는데 담당자가 알려준 면접장소는 경기 의정부였다. 이력서와 운전면허증을 준비하라고 했다.

한 구직자가 지난 5월 13일 서울 강남구 채용박람회에서 채용게시판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일당 30만원’ 미끼로 외제차 구입 유도

다음날 면접을 위해 의정부의 한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에 간판이 없었다. 담당자가 가져온 채용 매뉴얼에 적힌 회사명이 채용공고에 적힌 사명과 달랐다. 벽면에 걸린 현황판에는 람보르기니·벤츠·BMW 등 고급 수입차 모델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대출 한도가 얼마까지 나오는지 조회부터 하시죠.” 대출 이력을 물어보던 담당자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왜냐고 물었더니 일을 하려면 대출이 필요하다고 했다. 해당 업체 측이 밝힌 ‘일당 30만원’ 취업 과정은 다음과 같다.

수행기사가 하는 일은 해외 VIP 의전이다. 골프장이나 미팅 장소까지 운전을 해주는 게 주 업무다. 때문에 VIP에 걸맞은 ‘급’이 있는 차량이 필수다. 국산차는 취급하지 않는다. 최소 5000만원에서 1억원 이상 고급 수입차로 수행한다. 벤츠나 BMW 세단이 주요 차종이다. 업무 차량은 구직자가 사야 한다. 차량 명의도 지원자 개인 앞으로 등록한다. 구매 자금은 업체가 연결해주는 대부업체를 통해서 마련한다. 금리는 15% 이상으로, 보통 60개월 할부로 끊는다. 구매 차량의 차종과 연식은 구직자의 신용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대출 가능한 금액에 맞춰 차를 구입하는 셈이다. 매달 내야 하는 평균 할부금과 보험료는 200만원 정도다.

차량 관리와 보관은 업체가 맡는다. 개인 명의 차량이지만 업무 일정이 잡힐 때만 운전대를 잡을 수 있다. 운전 일정이 잡히면 차를 받고 운행이 끝나면 즉시 업체로 반납하는 구조다. 구직자들이 개별 구매한 차량은 법인 차량처럼 쓰인다. 기사들은 일감을 받을 때마다 업체가 지정하는 차량을 받아 운행한다.

당초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했던 설명과 달리 할부금과 보험료를 부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일하는 동안에는 회사에서 부담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개인 통장에 ‘일당’과 별개로 할부금과 보험료를 직접 입금해 준다고 했다. 다만 일을 그만두면 할부금·보험료 지원도 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일을 하고 싶어도 방문객이 끊겨 빚만 떠안게 될까 걱정된다고 말하자 ‘호황이기 때문에 그럴 일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일을 그만두고 싶으면 중고차시장에 차를 팔면 그만이라고 했다. 차량 매매 알선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영업 방식은 현행법상 불법이다.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은 자가용자동차의 유상 운송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법 위반 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섣불리 운전대를 잡았다가 처벌을 받고 고금리 대출 빚만 떠안을 수 있는 것이다. 렌터카 업계 관계자는 “해당 영업 방식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중고 외제차를 팔기 위해 대부업체와 손잡고 벌이는 상술”이라고 말했다. 국토교통부 담당자는 “자가용 자동차는 노선운송을 포함해 고객을 유치할 목적으로 유상운송할 수 없다”며 “최근에 이런 불법 사례들이 민원으로 접수되고 있다”고 말했다.

물류업체가 대형 택배사 이름으로 올리는 채용공고. 채용 사이트 캡처



같은 업체가 사이트마다 다른 이름 사용

‘일당 30만원’ 문구는 구직자를 불러 모으는 힘이 있다. 취업준비생을 비롯해 코로나19로 해고된 인천공항 수송 담당 협력업체 노동자, 서비스 종료로 일자리를 잃은 타다 드라이버와 같은 운전 경력 구직자를 파고든다. 면접을 보는 30여 분 동안에도 채용공고를 보고 찾아온 지원자들이 수시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이날 사무실 앞에서 만난 서울 소재 대학생 박현수씨(25·가명)는 “평창올림픽 때 수행 알바를 한 경험이 있어서 지원했다”며 “오자마자 대출 한도를 조회했는데 학생이라 얼마 안 나왔다. 그때부터 태도가 달라지고 설명을 잘 안 해주길래 그냥 나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요즘에 하루 30만원, 한 달 500(만원)씩 벌 수 있는 곳이 어디 있나. 딱 한 자리 남았다고 해서 바로 면접을 봤다”고 말했다.

인천공항 협력업체에서 해고된 뒤 구직 중인 이우석씨(42·가명)도 지난 5월 19일 해당 업체를 지원했다. 이씨는 “설명을 듣다가 ‘이거 사기다’라는 생각이 들어 중간에 나왔다”며 “같은 업체가 알바 사이트마다 다른 이름으로 계속 공고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수행기사 업체의 이른바 ‘외제차팔이’ 수법은 택배시장에서 판치고 있는 ‘탑차팔이’ 사기와 유사하다. 채용공고 사이트에서 이번에는 ‘택배기사’를 검색했다. CJ대한통운과 한진택배, 롯데택배 등 대기업 명칭을 내건 채용공고가 쏟아졌다. 이 가운데 회사 로고를 활용해 그룹 공개채용임을 강조한 CJ대한통운에 지원했다. CJ 계열사 공채를 강조했던 채용공고와 달리 면접 안내 문자에서는 CJ라는 명칭이 사라졌다. 다음날 서울 송파구의 사무실에 찾아가 면접을 봤다. 생각보다 회사 규모가 컸다. 새 건물에 입주해 있었고, 사무실 안에는 면접을 볼 수 있는 방 대여섯 개가 마련돼 있있다. 겉은 화려하지만 면접 과정은 수행기사 알선 업체와 비슷했다.

담당자는 ‘월 400만원’의 수익을 보장했고, 원하면 곧바로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코로나19로 택배 물류 시장이 활성화된 지금 들어와야 돈을 벌 수 있다며 빨리 일할 것을 권했다. 단, 조건이 하나 있었다. 배송할 때 쓸 1톤 탑차를 사야 한다고 했다. 포터2 모델을 기준으로 개조비용을 포함한 새차 구입비는 2500만원. 대출 한도 조회와 딜러 알선, 차량 자택 배송까지 일사천리로 이뤄진다. 개인 명의 차량인 만큼 할부금과 보험료는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초기 비용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업체 담당자는 “첫 3개월 동안은 할부금과 보험료가 면제되기 때문에 초기 비용은 없다고 볼 수 있다”며 “워낙 고수익이기 때문에 할부금은 부담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일까. 이현구씨(24·가명)는 지난해 12월 31일 알바 채용 사이트를 통해 CJ대한통운에 지원해 면접을 봤다. 1월 2일 이씨는 서울 영등포구의 한 물류업체 사무실에서 업무 계약을 맺었다. 이 자리에서 이씨는 2015년식 1톤 탑차(14만㎞ 운행)를 48개월 할부로 구입했다. 업체에서 연결해준 대부업체에서 매긴 금리는 17%였다. 차량 구매에만 이자를 포함해 180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 차량은 계약 당일 이씨의 집으로 배송됐다.

CJ대한통운 택배기사로 바로 일할 수 있다던 약속과 달리 일감은 주어지지 않았다. ‘왜 일자리를 주지 않느냐’고 항의했지만 여전히 일은 없었다. 결국 열흘이 지난 뒤 서울 동작구의 한 택배영업소에서 배송일 할 생각이 있느냐며 연락이 왔다. 모든 업무 조건이 약속과 달랐다. 이씨는 한진택배 관할 구역을 배정받았다. 배송 물량도 기대 이하였다. 해당 구역에서 이씨에게 배정된 물량으로는 월 100만원도 벌기 어려웠다. 물량이 많은 이른바 금싸라기 구역은 기존 택배기사들의 차지다. 일부 구역은 권리금을 끼고 거래가 될 정도다.

이현구(24·가명)씨가 물류업체를 통해 구입한 택배 배송용 탑차. 이현구(가명) 제공



말 달라지고 고금리 할부금액만 떠안아

무엇보다 택배 일을 하려면 화물운송종사자자격증을 취득해야 한다. 자격증 없는 운송 행위는 불법이다. 하지만 물류업체들은 자격증이 없어도 괜찮다며 차량 구매를 강요한다. 이씨 역시 자격증은 일하면서 천천히 따면 된다는 업체 측의 설명을 듣고 구매 계약을 했다.

이씨는 계약 내용이 다르다며 물류업체 측에 계약 파기를 요구했지만, 업체 측은 5개월째 ‘해결해주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그사이 해당 업체는 회사명을 변경했다. 이씨는 “채용공고, 서류에도 CJ로고가 박혀 있고 사무실 TV에서까지 CJ홍보 영상을 틀어둔다. ‘설마 대기업에서 사기를 치겠나’ 하는 생각에 계약했다”며 “결과적으로 전역하고 사회에 진출하자마자 빚더미에 앉게 됐다”고 말했다.

이씨와 같은 피해 사례는 코로나19 이후 택배시장이 주목받으면서 급증하고 있다. 택배 취업사기 상담 카페 운영자이자 현직 택배기사인 한남기씨는 “코로나19로 물류시장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이 택배 일에 뛰어들고 있다”며 “그만큼 피해자도 급증하고 있다. 피해 예방 영상까지 만들어 올려뒀지만 사기 피해를 호소하는 분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기 피해는 오롯이 개인 몫이다. 채용공고의 ‘얼굴’ 역할을 한 대형 택배회사, 차량 구매를 유도한 물류업체, 대부업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피해자가 사기죄로 해당 업체를 고소·고발하면 업체 측은 ‘당사자가 원해서 계약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류업계 관계자는 “계약서는 있는데 사기를 입증할 자료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건이 ‘혐의없음 처분’으로 끝난다”고 말했다.

대형 택배회사는 오히려 명의를 도용당한 피해자라는 입장이다. 대형 택배사 관계자는 “채용공고에 우리 회사 이름 쓰지 말라고 요청을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통제가 안 된다”며 “사기 행각으로 회사 이미지가 나빠져서 우리도 피해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이 같은 사기 피해 실태를 알고 있다. 하지만 마땅히 규제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 국토부 관계자는 “개인이 브로커에게 속지 않고 잘 알아보고 계약하는 게 중요하다”며 “채용 사이트상에서 허위 과장 광고 문제는 공정거래위원회나 소비자보호원 소관”이라고 말했다.

반기웅 기자 b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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