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언어는 없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2020. 5. 3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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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5월 25일 대구 수성구 만촌동 인터불고 호텔에서 2차 기자회견을 열고 발언을 하고 있다.김창길 기자


지난 5월 25일 피해생존자이자 활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의 2차 기자회견 이후 ‘정신대’와 ‘위안부’의 용어 차이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언론은 ‘위안부’와 1944년 전 ‘여자근로정신대’를 비교하면서 용어의 혼동이 연구의 부족이나 시대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 양 지적한다. 그러나 정신대는 1938년 총동원체제 이후 일상화된 용어였으며, 같은 시기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위안부’ 동원과 맞물려 결과적으로 ‘위안부’와 착종된 말이었다.

■정신대와 위안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초대 대표 윤정옥은 17세 때인 1942년, 미혼여성을 ‘처녀공출’ 또는 ‘정신대 동원’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1945년 8월 해방이 된 뒤 전쟁터로 끌려간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고 걱정됐다. 여러 차례 서울역에 나가 해외에서 들어오는 징용자·징병자들을 붙들고 그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는지 물어봤다. 어느 날 어느 남자가 툭 던졌다. “그 애들은 정신대가 아냐, 위안부야.”

윤정옥은 이때 ‘위안부’라는 말은 처음 들었다.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다. 일본과 한국의 책을 들춰보면서 ‘위안부’에 대해 추적했고, 일본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임을 알았다.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가 저지른 사건이라고 생각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980년대 후반 여성활동가들이 공감했고, 그렇게 1990년 11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만들어졌다.

윤정옥은 정대협이 자신의 경험을 ‘정신대 피해’로 인식하고 있는 피해자들이 신고하기 위해 찾아올 수 있는 조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이 있었고, 언론은 일제히 ‘정신대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에 대해 보도했다. 기사 중에는 ‘정신대’와 ‘위안부’가 혼용되었다.

■역사로 톺아보는 ‘정신대’라는 말
2012년 제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선 이후 역사부정을 통한 일본 사회의 우경화가 두드러졌다. 우익들은 일본에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처음 보도한 <아사히신문>을 집요하게 공격했고 ‘여자정신대라는 명목으로 전장으로 연행돼’라는 기사를 쓴 기자가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분 못 하는 날조 기자라고 공격했다. 그해 말 <아사히신문>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한 기사는 오보였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정신대’와 ‘위안부’는 서로 다른 것으로 기정사실화되었다. 하지만 어째서 식민지 시기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정신대를 위안부로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았다. 이렇게 기억은 일본의 기억으로 덧칠됐다.

정신대는 일본어 ‘데이신타이(挺身隊)’의 한자를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이는 ‘혼신을 다해 나아가는 부대’라는 뜻의 일본군 전시(戰時) 선전 용어다. 러일전쟁 중인 1905년 4월 13일 <아사히신문> 기사에서 일본군 장교를 ‘정신대 대장’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일본 언론은 학술정신대·무역정신대 등의 표현을 쓰면서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조직에 정신대라는 미사여구를 붙였다.

정신대는 국가에 대한 개인의 헌신을 미화하는 말이었다.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이 시행되고 본격적인 전시동원체제에 들어가면서 대중의 사상과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애국정신대’·‘농촌정신대’·‘국어(일본어)보급정신대’·‘산업정신대’ 같은 이름의 조직들이 생겨났다. 이 시기 정신대는 자발적인 전쟁협력의 외양을 띠었으나 거부하면 비국민이라는 낙인을 감수해야 했다. 1941년부터는 조선총독부가 14세에서 25세 사이 미혼여성을 근로보국대로 편성했다.

1944년 8월14일 미얀마 미치나에서 촬영된 한국인 위안부 피해자들의 모습이다./서울시·서울대 정진성 연구팀 제공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다”
바로 이 시기, 돈벌이를 빌미로 사라지는 여성들이 늘어났다. 일본이나 만주의 군수공장이나 종군간호부로 가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듣고 따라갔는데 소식이 끊겼다. 주로 ‘처녀들’이고 전쟁터에서 군인들의 빨래를 하거나 피를 뽑히거나 한다는 소문이 들렸다. 밤에는 군인들의 위안을 해야 한다는 말도 뒤따랐다.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말들이 치안을 어지럽히는 유언비어일 뿐이라며 육군 형법 위반죄로 처벌했지만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1940년대 들어와서는 부락마다 처녀를 공출해 전선에 보낸다는 식으로 소문은 더 구체화됐다.

경남 양산의 김복동은 1941년 동네 구장이 ‘나라를 위해 데이신타이에 가야 한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중국 광둥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어머니가 데이신타이가 뭐냐고 했을 때, 구장이 “군복 만드는 공장에 가서 일하는 것”이라고 했다. 1945년 전남 승주의 이남님 또한 정신대로 뽑혔다는 구장의 말에 버마의 위안소로 보내졌다. 구장은 ‘정신대가 군인들의 밥과 빨래를 하거나 군복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며 ‘전쟁 덕분에 큰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1942년에 버마의 위안소로 동원된 이용녀는 싱가포르로 가는 배 안에서 ‘위안부’로 간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위안부’가 뭐하는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다.

종전 후 위안소를 드나들었던 병사, ‘위안부’를 목격했던 동포, 정신대와 처녀공출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조선의 여자들이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가 되었다’는 서사를 완성했다. 이런 서사는 해방 직후부터 김학순이 등장할 때까지 언론 지면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일본 언론도 1960년대까지 ‘정신대나 위문대 명목으로 동원된 위안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사실 ‘위안부’도 미화된 언어다. ‘병사를 위안함으로써 전쟁승리를 돕는 여성’이라는 일본군의 관점이 배 있다. ‘국익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조직’이라는 정신대의 말뜻을 생각했을 때 위안부든, 정신대든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된 언어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당시 식민지 여성들에게는 돈벌이 또는 새로운 삶의 기회라는 감언이설도 있었다. 정신대든, 위안부든 끌려간 여성들이 그 말의 의미를 실감한 것은 벗어나기 힘든 위안소 생활을 시작한 뒤였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그 기억을 악몽이나 지옥으로 묘사하거나 망각이나 침묵으로 거부했다. 1990년대부터 국제사회는 ‘자유와 자율성을 박탈당한 전시 성폭력 피해자’라는 의미를 담을 용어로 전시 성노예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만약 우리 사회가 어떤 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말의 역사가 성폭력 피해자의 관점으로 세상을 전망하는 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전시 성폭력 피해자의 역사를 쓰는 일은 성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중요하다. 이를 위해 타자화된 말들의 싸움에 휩쓸리기보다 언어의 역사성을 인식하고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말을 찾아야 할 때다.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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