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심 '무죄'였던 직장 성추행, 대법원은 왜 '유죄' 판결했을까

허진무 기자 입력 2020. 5. 31. 11:28 수정 2020. 5. 3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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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마포구의 한 회사 과장 고모씨(40)는 2016년 10~11월 옆자리에 앉은 신입사원 ㄱ씨(26)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거부하는데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비비며 “여기를 만져도 느낌이 오냐”고 말했다. 고씨는 등뒤에서 ㄱ씨의 어깨를 두들기고 돌아보면 “앙” 소리를 냈다. 자신의 입술을 핥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고씨는 평소 남녀를 불문하고 회사 직원들에게 성희롱을 일삼아왔다. 고씨는 ㄱ씨에게 “볼이 발그레하다” “화장이 마음에 든다” “오늘 촉촉하다”고 말했다. 성행위를 뜻하는 손짓을 하고, 컴퓨터로 음란물을 보여주기도 했다. 고씨의 성희롱이 이어지자 ㄱ씨는 1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병원에서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검찰은 고씨를 성폭력처벌법 위반(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혐의로 기소했다. 업무·고용이나 그 밖의 관계로 보호·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력으로 추행한 행위를 처벌한다.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위력’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한다. 폭행이나 협박은 물론 사회·경제·정치적인 지위도 포함된다. 재판에서 ‘위력’을 증명하기는 어려웠다. ㄱ씨는 최종심인 대법원에서야 성추행 피해를 인정받았다.

■1심 무죄 “피해자가 두려움이나 위축감 없다”

1심인 서울서부지법 이은희 판사는 2018년 10월 고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고씨가 상사이긴 하지만 ‘위력’을 행사해서 성적 자유의사를 제압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재판부는 “고씨는 경력사원으로 피해자보다 2개월 일찍 입사한 정도여서 업무를 지시하는 위치이기는 했지만 영향력이 큰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가 성적 농담이나 장난으로 대응하기도 했다”고 했다.

성희롱에 대한 항의와 거부는 오히려 고씨가 무죄를 받는 근거가 됐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고씨의 성적 농담이나 표현에 대해 직접 싫다고 말하기도 하고 팀장에게 성희롱을 알리기도 했다”며 “피해자의 태도에 비춰 고씨와의 관계에서 의사를 표현하는 데 심리적 두려움이나 위축감을 갖고 있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부는 검찰이 기소한 ‘신체 접촉’ 자체보다는 고씨의 평소 언동이 성적 수치심을 불렀다고 봤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회사에 근무하는 1년 동안 검찰의 공소사실에 적힌 신체 접촉은 1~2회 정도 있었고 신체 접촉만으로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기보단 평소 고씨의 성적 행동과 결부돼 수치심을 느꼈다고 진술했다”고 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심도 무죄 “손가락으로 비비는 정도”

검찰은 항소했다. 수습사원인 ㄱ씨가 고씨의 지시와 평가를 받아 업무·서열상 상하 관계에 있었고, ㄱ씨는 수습기간이 끝나고 나서야 고씨의 행동에 적극적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고씨가 ㄱ씨에게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고, 지위를 이용해 성적 행위를 했으며, 이런 행위가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도 성적 수치심을 일으킨다고 주장했다.

항소심인 서울서부지법 형사1부(재판장 이내주)는 지난해 6월 고씨에 대해 재차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회사가 젊은 직원들로 구성돼 직장 분위기나 인간관계 측면에서 위계질서가 강한 조직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업무공간이 개방형 구조로 돼 있어 어떤 행동을 할 경우 모든 직원이 볼 수 있거나 파악할 수 있는 형태였다. 피해자가 과장인 고씨의 목에 낙서하는 등 장난치기도 했다”며 위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고씨가 머리카락과 어깨를 만진 행위도 성적인 의도로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재판부는 “고씨가 접촉한 신체 부위가 머리카락과 어깨 끝 부분”이라며 “신체 접촉이 머리카락을 성적인 의도로 쓸어내리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이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이용해 비비는 정도다. 상대방을 부를 목적으로 어깨 끝 부분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는 정도다”라고 했다.

■대법원 “위력 충분히 인정”

검찰이 상고한 끝에 최종심인 대법원은 무죄를 뒤집고 유죄 판결했다. 대법원 3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지난 14일 고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서부지법에 돌려보냈다고 31일 밝혔다. 사건을 환송받은 법원이 유죄 판결하면 고씨는 3년 이하의 징역이나 1500만원 이하의 벌금을 선고받는다.

재판부는 고씨와 ㄱ씨의 관계를 살펴보면 ‘위력’을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고씨의 거듭되는 성희롱적 언동에 피해자가 거부감을 보이고 반발하자 고씨는 자신의 일을 피해자에게 떠넘기고 퇴근하거나, 퇴근시간 직전 일을 시켜 야근하게 하거나, 회사와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아 일처리 하는 데 애먹게 하기도 했다”고 했다.

재판부는 고씨의 성희롱적 언동을 평소 수치스럽게 생각하던 ㄱ씨의 의사에 반해 신체 접촉을 한 것은 ‘추행’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도덕적 비난을 넘어 추행 행위라고 평가할 만하다”며 “고씨와 피해자의 관계, 추행의 행태, 당시의 경위 등에 비춰 보면 고씨가 위력으로 추행했다고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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