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기의 시시각각] 통합당이 기본소득 논의 주도를

전영기 2020. 6. 1.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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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비스마르크 "신의 옷자락 잡아라"
머뭇거리다 군소정당 전락할 것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는 단두대에 오르면서 “나는 10년 전 오늘과 같은 사태가 올 것을 예상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신흥 부르주아 세력의 역사적 전진을 알아차렸으면서도 정치적 대처에 게으름을 피우다 화를 당했다는 회한일 것이다. 그는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나약했다. 개혁 의식만 있었지 궁중의 특권과 관습에서 빠져나올 줄 몰랐다. 반면에 근대의 독일 통일국가를 성립시킨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보수적인 봉건 귀족 출신이지만 신흥 노동계급의 정치적 도전을 선제적으로 흡수해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비스마르크는 과감한 개혁 조치로 혁명의 혼란스러운 기운을 제압했다. 당시 유럽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담하고 창의적인 복지 개혁을 실시해 사회민주당의 혁명 열기를 식혔다. 의료보험, 산재보험, 연금보험 등으로 노동자의 사회적 상황을 개선했다. 비스마르크는 “신이 역사 속을 지나갈 때 그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잡아채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는 말을 남겼는데, 그의 사회복지 정책은 보수가 세상의 변화에서 튕겨나가지 않기 위한 생존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미래통합당은 세상의 변화를 가볍게 여겨 마음만 있을 뿐 실천에 게을렀던 루이 16세의 마지막 처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오늘부터 김종인 비대위원장 체제가 시작되지만 언제든 국회 3분의 1 의석인 개헌선이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소수당이 되었다. 반면에 더불어민주당은 거대 공룡 체제를 구축했다. 선거 전에 꿈꿨던 일본의 자민당식 1.5당 지배 체제 즉, 여당 안에 여야 기능이 작동하고 통합당은 군소정당으로 추락하는 그림을 거의 완성한 것이다(2019년 4월 민주연구원 보고서).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대통령은 제1 야당 원내대표의 원자력 생태계 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요청조차 눈앞에서 일축했다. 민주당은 위안부 할머니를 울린 윤미향을 끝까지 보호한다거나 국회 18개 상임위원장 모두를 자기 당 사람으로 앉히겠다는 낯 두껍고 뻔뻔한 행태를 보였다. 그뿐인가. 느닷없이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5년 전 대법원 판결을 뒤집으려 한다. 아마 8·15 광복절 때 대통령이 사면복권하려는 포석인 듯하다. 정부는 7월에 공수처가 설치되면 검찰부터 손보겠다는 패권적 태도도 숨기지 않고 있다. 당·정·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 모든 일이 제1 야당은 더 이상 안중에 없다는 경멸의 표시다. 정치에서 순리와 상식은 사라졌다. 노골적인 힘자랑이 일상이 됐다. 야당이 쓸 수 있는 수단이 거의 없다는 점은 역사의 비극에 가깝다. 통합당은 스쳐 지나가는 ‘신의 옷자락’을 어디에선가 잡아야 한다.

통합당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김종인 위원장은 시대의 흐름상 기본소득 논의를 선제적으로 제기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은 아직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어떤 표준도 확립되지 않았다. 그러니 누구의 것도 아니다. 다만 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 정부를 압박해 코로나 재난지원금을 국민 모두한테 빠짐없이 나눠줌으로써 기본소득의 맛을 유권자가 살짝 볼 수 있었다. 표를 휩쓰는 데 위력적이었다.

기본소득은 포퓰리즘 논란에다 재정 건전성 문제 때문에 보수적인 통합당 풍토에서 금기시됐다. 그렇지만 판도라의 상자처럼 한번 열린 기본소득을 마냥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다간 집권 기회를 영원히 놓칠 수 있다. 기본소득은 비스마르크의 전통을 따라 보수의 어젠다라는 측면도 있다. 따라서 외면하기보다 직접 뛰어들어 현실적인 안을 만들어 내는 편이 낫다. 독일 유학생 출신의 재정학자로 누구보다 기본소득의 허실을 잘 알고 있는 김종인이 논의를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통합당이 당의 명운을 걸고 이 문제에 달려들 만하다. 역사의 경험에 따르면 보수든 진보든 상대방 이슈를 내 것으로 선점할 때 집권의 기회가 열리곤 했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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