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경 칼럼] 이용수 할머니를 왜 '토착왜구'로 정죄하는가

이하경 2020. 6. 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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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 폭로하자 혐오·비하
진보의 인권·정의가 이런 것인가
대통령, 부당한 공격 자제시켜야
탈 '친일 프레임' 한·일 관계 회복을
이하경 주필

국회에 입성한 윤미향 정의기억연대(정의연) 전 이사장은 당당하다. “속을 만큼 속았고, 이용당할 만큼 당했다”는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진심어린 사죄와 반성은 없다. 친문(親文) 지지자들의 ‘이용수 할머니 때리기’는 도를 넘었다.

앨버트 반두라 스탠퍼드대 심리학부 명예교수가 제시한 ‘도덕적 탈구속(moral disengagement)’ 케이스의 전형이다. 자기 이익을 위해 파괴적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정당화를 시도한다. 자신의 악행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기 위해서 피해자를 비하한다. 참 잔인한 심리상태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제의 전장에 끌려가 몹쓸 고통을 겪은 소녀였다. 2007년 미 의회 청문회에서 증언했고, 하원 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이끌어낸 주역이었다. 그런데도 친문 지지자들은 “토착왜구” “기억이 온전치 않은 치매노인”이라고 혐오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자기 진영의 ‘불편한 진실’을 폭로한 것이 정죄(定罪)의 배경이다. 진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인권과 정의가 이런 것인가.

여당은 “할머니의 분노는 ‘내가 정치를 하고 싶었는데 나를 못하게 하고 네가 하느냐, 이 배신자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폄하한다. 야심을 지닌 사람들이 친문 극렬 지지층에 잘보이려고 경쟁하고 있다. 극우 태극기부대에 휘둘렸던 보수 야당과 무엇이 다른가.

윤미향과 정의연이 책임져야 한다. 다수가 침묵할 때 그들이 전 세계에 반인도적 범죄 사실을 알린 헌신은 인정한다. 그러나 비판과 감시가 존재하지 않는 성역을 만들고 절대권력을 휘둘러 일을 이 지경으로 망치지 않았는가.

모금활동에 동원된 할머니가 배가 고프다는데 밥을 사주지 않은 것은 잘못이다. “모금한 돈으로는 밥을 사줄 수 없다”는 궤변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인했다. “국제사회에서 잘 먹힌다”는 이유로 당사자가 그토록 싫어하는 ‘성 노예’라는 표현을 고집한 것도 문제가 있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거역한 주객전도는 시민운동의 율법을 더럽혔다.

그들은 ‘전시 폭력 방지’라는 추상적 깃발을 들고 질주했다. 하지만 눈앞에 살아 숨쉬고 있는 인간의 아픔과 수치심을 무시했다. 이건 시민운동이 아니다. 인간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부정하는 전체주의의 폭력일 뿐이다.

이명박 정부의 천영우 외교안보수석은 2012년 사이토 일본 관방 부장관과 막후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사이토는 “할머니 한사람 한사람을 주한 일본대사가 직접 만나 총리의 사과 친서와 일본 정부의 보상금을 직접 전달한다”는 안을 제시했다. 천영우는 관계자들을 만나 사이토 안을 설명했다.

“다수의 할머니는 일본의 사과와 보상을 다 받아내면 최선이지만, 그게 안 되면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고 싶어 하는 인상이었다. 그러나 윤미향 정대협(정의연의 전신) 대표는 곤혹스러운 표정이 가득했다. 정대협으로선 이제 문 닫을 준비를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천영우가 비사(秘事)를 공개한 것은 “정대협·정의연이 피해자와 국가가 아닌 사익(私益)을 위해 존재했다”는 엄중한 문제제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용수 할머니를 향한 지지자들의 공격을 자제시켜야 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각별한 연대감을 가졌던 한 인간에 대한 예의다. 2004년에도 33명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성명을 내고 “위안부 할머니들을 앵벌이로 팔아 배를 불려 온 악당들”이라고 정대협을 비판했다.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공격은 위안부 할머니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다.

윤미향은 “탈탈 털린 조국 전 장관이 생각난다”고 했다. 지지층을 자극해 자신을 압박하는 비리 의혹을 패거리 진영싸움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넘어가면 ‘제2의 조국 사태’가 온다. 코로나 위기를 극복해야 할 정부는 길을 잃고, 의원직 사퇴를 요구하는 70%의 국민은 싸늘하게 등을 돌릴 것이다.

정의연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이 경직된 친일·반일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체제가 다른 북한·중국·러시아와 접하고 있는 한국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가치를 공유한 선진국 일본과 협력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평생 일본과 싸웠던 백범 김구도 해방이 되자 “일본이 바로 이웃에 사는데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고 했다. 문 대통령의 대범한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 강경했던 아베 일본 총리의 자세도 달라졌다고 하지 않는가.

이용수 할머니는 “피해자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현실적이고 실현가능한 방안을 한·일 양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일본과 한국은 이웃나라다. 젊은 사람들은 서로 함께 활발하게 지내야 한다. 역사 문제는 그렇게 해결해야 한다”고 했다.

큰 아픔을 겪은 피해자가 단기 과제인 위안부 문제와 장기 과제인 역사 문제를 분리해 양국관계를 개선하자고 했다. 정의연의 막무가내식 근본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부끄럽고 놀랍지 않은가. 이제 문 대통령의 결단만 남았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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