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두대에 선 왕, 그 시작은 회계부정이었다

김태훈 출판전문기자 2020. 6. 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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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훈의 이슈&북스]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역사는 때와 장소를 달리하며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윤미향 의원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 관련 각종 의혹을 해명하라는 국민적 요구에 대해 윤 의원과 정의연, 집권당, 시민단체들의 행태는 프랑스대혁명을 부른 당시 부르봉 왕조의 대응방식과 흡사하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시작된 혁명으로 국왕 루이16세와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후 수많은 프랑스인이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비극의 시작이 불투명한 왕실 회계에서 비롯됐다.

◇ 루이16세의 재무총감, 사치 낭비 가득한 왕실의 회계 공개

혁명 8년 전인 1781년, 당시 프랑스 재무총감 자크 네케르는 그 해 왕실의 재정 상태를 설명한 '왕에게 드리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던 왕실 살림 면모가 마침내 드러났다. 약 2억5000만 리브르의 경상 지출 중 6520만 리브르가 군사비에, 2570만 리브르가 궁정과 왕실에 쓰였다. 반면 도시 미화 등에는 150만 리브르가, 무주택 빈민층에는 고작 90만 리브르가 배정됐다. 왕실의 사치와 낭비가 초래한 적자를 숨겨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네케르는 "국왕이 식비 지출 관리를 조금만 더 잘해도 지출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민은 분노했다.

프랑스대혁명으로 왕좌에서 쫓겨난 뒤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루이16세.

네케르는 “수입과 지출이 균형을 이루는 장부는 도덕적인 정부, 행복한 정부, 번영하는 정부, 강력한 정부의 토대”라며 개선을 촉구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은 네케르가 ‘전제군주제의 기본 교리인 비밀유지’ 원칙을 위태롭게 했다고 비난했다. 외무대신 베르젠은 “이 보고서는 국왕에게 헌신하는 프랑스의 국민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난했다.

윤 의원과 정의연을 옹호하는 이들은 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하라는 요구를 “위안부 인권운동의 숨통을 끊으려는 토착왜구의 공격”이라며 민족감정을 방패 삼아 회계 부정 의혹을 돌파하려는 행태도 당시 프랑스 왕실측 대응을 닮았다.

네케르가 입헌군주제 하에서 왕실의 재정 투명성을 높인 영국 민주주의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자 외무대신 베르젠은 “선조들이 그토록 혐오한 영국 행정부를 네케르가 인용하도록 폐하께서 허용하신다면 프랑스의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라며 루이16세 편을 들었다. ‘네케르는 친영파(親英派)’라는 억지 주장을 펴면서 비판 목소리를 억압하려 했다.

왕실 재정을 폭로한 네케르 보고서의 진실성을 전면 부인하기도 했다. “네케르가 제시한 수치는 망상에 불과하다. 보고서가 만든 환상과 대중매체의 선풍은 싹을 잘라버려야 한다”고 했다.

◇ 프랑스 왕실, "회계 공개한 자는 친영파" 엉뚱한 물타기

이런 목소리가 루이16세를 도왔는가. 오히려 그 반대다. 루이16세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부르봉 왕조의 맥을 끊었다. 왕실 회계의 건전성을 확립해 위기를 돌파하는 자기반성과 뼈를 깎는 자기 개혁이 있었다면 프랑스대혁명의 비극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 왔는가(제이컵 솔 지음)

미국 역사학자이자 회계학자인 제이컵 솔은 저서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했는가’에서 투명한 회계를 사회의 도덕적 잣대이자 민주주의의 근간으로 규정한다.

'성공적인 사회는 회계와 상거래 문화가 풍부한 사회일 뿐 아니라, 회계를 무시하고 날조하고 등한시하는 인간의 습성에 대처하기 위해 견고한 도덕적·문화적 틀을 구축하는 데 노력해온 사회다'(13쪽)

솔 교수는 이 책에서 투명한 회계를 두려워하는 것은 전제주의 군주들의 행태라고 지적한다. 민주주의와 공화정은 회계의 투명성 위에서만 존립 가능하다. 솔 교수는 모범적인 사례로 고대 그리스의 시민 민주주의를 꼽는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회계를 정치적 책임성과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처음부터 복잡한 부기와 공적 감사 시스템이 아테네 민주주의 정부의 중심에 놓여 있었다.(…)모든 아테네 공무원의 회계장부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정치 철학에 따라 감사의 대상이 되었다. 아레오파고스(최고재판소)의 원로들과 남녀 성직자들도 공금뿐 아니라 선물을 비롯하여 모든 자금을 철저하게 기록해야 했다.(…)부패 혐의가 의심되면 이 회계관리들은 해당 관리의 주장을 듣기 전에 장부부터 파헤쳤다.'(26쪽)

국가나 공공법인처럼 세금이나 성금·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조직 투명한 회계 요구는 지극히 정당하고 타당한 것이다. 이런 요구를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분열시키고 훼손하려는 움직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활동한 사람들의 30년 운동역사를 짓밟기 위해 악의적으로 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하는 방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문제해결 방법이 될 수 없다.

검찰이 의혹 있는 계좌 10여개를 추적하고 있다. 집권당이 이런 뻔한 의혹을 비호하는 이유도 함께 밝혀져야 한다. 어물쩍 넘어갔다간 국민이 들고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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