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임기 지도→가임 연령..정부의 성차별 '연대기'

CBS노컷뉴스 유원정 기자 2020. 6. 3.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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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 딥이슈] 가임기 지도 4년 뒤 국토부 조사에 또 여성만 '연령제한'
가임기 기준으로 신혼부부 여성 연령 만49세 이하로 책정
성차별 비판 들끓자 국토부 "앞으로 연령제한 폐지"
정체된 정부기관 성인지 감수성..시대착오적 인식 '뭇매'
"혈연 중심 정상가족 관점 벗어나야..여성 차별 사라져야 저출산도 해소"
행정안전부(전 행정자치부)가 2016년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대한민국 출산지도'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정부기관의 성인지 감수성은 정권이 바뀌고도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2016년 행정안전부(전 행정자치부)의 '가임기 지도'에 이어 이번에는 국토교통부(이하 국토부)의 신혼부부가구 중 여성배우자 연령 기준이 도마 위에 올랐다.

국토부는 지난 1일 전국 6만 가구 대상으로 실시한 2019년 주거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토부는 이 조사를 통해 신혼부부, 청년, 취약계층 등에 대한 정부 지원이 강화돼 이들의 주거 수준이 개선됐다고 밝혔다.

그런데 '신혼부부가구'를 정의한 문구가 문제였다. 조사에 따르면 '신혼부부가구'란 혼인한지 7년 이하이면서, 여성배우자의 연령이 만49세 이하인 가구이다. 신혼부부가구를 집계할 때, '여성배우자'만 나이 제한을 둔 것에 성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이는 전국 여성을 '임신 가능한 개체'로 취급했다가 뭇매를 맞은 '가임기 지도'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여성배우자 연령 기준을 임신이 불가한 평균 시점 이전으로 못박으면서 남성과 달리 여성은 '가임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만' 신혼부부로 인정하겠다는 의도로 읽히는 탓이다.

실제로 국토부 관계자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는 것은 아니다.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신혼부부가구를 정한 것으로 올해뿐만 아니라 예년부터 이 기준으로 조사해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혼부부는 혼인한 지 7년 이하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것이다. 남성의 연령은 (49세 이상이어도) 상관없다"라고 덧붙였다.

즉, 신혼부부가구에 내포된 의미 자체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가구'이기 때문에 여성배우자의 '가임 가능한' 연령을 이 같이 설정한 것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다.

(이미지=연합뉴스)
이 같은 해명에 네티즌들은 여전히 냉담한 시선을 보냈다. 무엇보다 4년 전 '가임기 지도'로 여성을 출산도구로 취급했다고 비판 받았음에도 정부기관이 아무런 반성과 발전이 없었다는 비판이 확산됐다.

한 네티즌(아이디: ma*****)은 "불임이면 줬던 집 뺏을 것도 아니고, 가족구성원수를 주거복지의 기준으로, 인구증가를 주거복지의 목표로 삼을 것이라면 신혼부부 혜택을 아예 폐지하고 유자녀, 다자녀 기준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성을 가축 취급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라고 꼬집었다.

또 다른 네티즌(아이디: Sy*****)은 "이 나라는 가임기 지도 이후로도 문제의식하나 느끼지 못하고 단 한발자국도 발전하지 않았다. 이건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은 것"이라며 "나를 애 낳는 기계로 보겠다면 파업하겠다. 있는 힘껏 비혼, 비출산 하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국토부는 2일 주거실태조사에서 신혼부부 중 여성배우자의 연령제한 기준 폐지를 결정했다.

국토부는 이날 공식입장을 내고 "신혼부부 중 여성배우자의 연령을 제한하는 것은 성평등 가치에 부합하지 않고 정책이 성차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만큼 향후 주거실태조사부터는 연령제한 기준을 폐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또 "정부에서 추진 중인 신혼부부를 위한 공공임대주택 입주자격, 청약기준, 금융지원 대상 기준 등에서는 전혀 여성배우자의 연령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왜 정부기관은 똑같은 실수를 2020년에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주거 정책을 평가·주관하는 정부기관이 여전히 시대착오적 인식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다.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표면적 수치만으로 저출산 문제를 바라보는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의 권수현 대표는 "이런 생물학적인 구분으로 여성에게만 조건이나 기준을 정하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신혼부부들의 비출산 이유는 여성의 '가임기'가 끝나서만이 아니다"라며 "여성만 신혼부부 연령을 제한해 저출산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모양새는 오히려 반발을 부른다. 정부기관에 보다 나은 성인지 감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일침했다.

이어 "애초에 이제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4인 가족 체제는 붕괴되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 출산을 전제로 한 혈연 중심의 정상가족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면 이는 예산 낭비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사고와 관점의 전환을 통해 주거 정책을 재구성해야 한다"라고 가족 개념의 변화를 촉구했다.

이처럼 사회구성원들은 더 이상 결혼과 출산을 동일선상에 놓지 않는다. 임신이 가능해도 합의 하에 자녀를 낳지 않는 신혼부부가 수두룩하다. 더 이상 가임 여성 숫자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임신·출산·육아에도 여성의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고민할 시점이다.

권 대표는 "저출산 해결의 목적을 위해서 신혼부부에게 주거를 제공한다는 인식 자체부터 바뀌어야 한다. 저출산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며 "특히 주체인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노동시장에서 차별받거나, 경력이 단절되는 등 일과 가정이 양립할 수 없는 구조와 환경이 근본적으로 해소돼야 한다"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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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유원정 기자] ywj2014@c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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