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한겨레

[편집국에서] 누구도 양심을 장담할 수 없다 / 석진환

석진환 입력 2020.06.03. 18:16 수정 2020.06.0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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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환 ㅣ 이슈 부국장

최근 다시 뉴스에 등장하는 한명숙 전 총리 수사가 처음 시작됐을 때, 나는 검찰 출입 기자였다. 그 직전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때도 검찰 담당이었다. 두 사건이 진행됐던 2009~2010년 사이, 나는 이메일과 댓글로 독자들의 무수한 비난과 항의를 받았다. 험한 욕설도 섞여 날아들었다. 어떤 날엔 아침에 메일함을 열어보기가 두려웠다. ‘그래도 <한겨레>만큼 검찰 수사에 비판적인 언론이 있느냐’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한겨레> 역시 검찰발 기사의 타성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검찰의 정치적 의도를 비판하는 기사를 꽤 썼으나, 표적 수사에 화난 독자의 분을 삭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이후 수사와 재판을 지켜보며 기자가 아닌 한 시민으로서 한 전 총리만은 정말 무사하길 바랐다. 당시 한 전 총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나는 그의 인생을, 삶의 자세를 진심으로 믿었다.

이후 결과는 독자들이 아는 그대로다. 그는 1차 수사(수뢰 혐의)를 이겨냈지만, 집요하게 같은 과녁을 겨냥한 2차 수사(정치자금법 위반)의 화살은 피하지 못했다. 불법정치자금 9억원이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서 ‘2심 재판장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또는 대법관 구성이 달랐으면 9억원 중 6억원에 대한 판단은 다를 수 있었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대법관 전원이 일치된 의견으로 유죄 판단을 내린 3억원 부분에서 나는 낙담했다. 검찰이 아무리 해괴한 술수를 쓰더라도 한 전 총리라면 꼬투리 잡힐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거란 기대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최근 더불어민주당과 지지층을 중심으로 당시 2차 수사와 재판에 관한 여러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있다. 검찰은 여전히 표적을 옭아매는 별건 수사, 압박과 회유에 능하다. 10년 전 사건의 수사 과정을 재조사해 검찰의 수사 관행을 다잡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조사를 하더라도 물증까지 있는 3억원 부분에 관해서는 한 전 총리가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복권될 것 같지 않다. 재심이 가능하지도 않고, 정치적 명예를 회복하려는 시도는 한 전 총리에게 더 깊은 상처만 남길 가능성이 커 보인다.

나는 여전히 한 전 총리가 살아왔던 인생이 권위주의 정권 시대를 살아낸 그 누구보다 헌신적이었고 양심적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사건으로 그 사람이 살아왔던 인생이 평가받는 건 가혹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 사람이 평생 감내했던 희생과 노력을 이유로 정치적 면죄부가 주어지거나 잘못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비판이 위축될 일도 아니다.

지난달 노무현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한 한 전 총리는 주변에 ‘제가 인생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다. 추가 보도를 지켜본 뒤 적절한 시기에 입장을 밝힐 예정’이라고 거듭 결백을 말했다고 한다. 법적 판단이 끝났고, 재심도 어렵고, 돈을 줬다는 한만호씨도 이미 세상을 떠났으니, 한 전 총리의 결백 주장은 이제 신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듯해 안타깝다.

총선을 통해 177석의 최대 권력이 된 직후 보여준 민주당의 처신도 많은 국민에게 오만하게 비쳤을 것이다. “준 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는 뇌물 혐의를 씌워 한 사람의 인생과 명예를 무참하게 짓밟았다.”(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 수사의 문제점을 따져보자는 것이면 모를까,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13명 대법관 전원의 판단을 없었던 것처럼 말했다. 정치적 효과만 의식한 무책임한 발언이다.

“욕망과 감정은 거대한 빙산이며, 인간의 이성은 그 위에 아주 조그맣게 떠 있는 섬이다. 이 허약한 이성이 평생 내 안의 동물을 다스리는 일이 삶이다. 삶이 끝날 때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의 양심은 절대 장담해선 안 된다.”(작사가 이주엽)

지난주 한 신문 칼럼에서 본 이 대목을 내 자신을 위해 읽고 또 곱씹었다. 한국의 주류 세력이 바뀌었다는 진단이 나오는 세상이다. 진보개혁 세력이 양심과 도덕에서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누구도 양심을 장담할 수 없다.

soulfa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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