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년된 태안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조선시대 군인명부 쏟아졌다

이기환 선임기자 2020. 6. 4. 09: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177년 된 섬마을 폐가의 벽지에서 발견된 19세기 군적부. 군역의 의무가 있던 장정 명단과 특징을 적은 공문서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제공

“응? 상량문이 보이네. 저건 ‘수군(水軍)’이라는 글자네”. 지난 4월 21일 충남 태안 신진도에 근무중인 정동환 산림청 산림수련관 시설관리인(45)은 연수원 근방의 숲을 답사하다가 다 쓰러져가는 폐가를 발견한다. 사람들 눈길에 닿지 않은 곳에 숨어있었던 폐가였지만 왠지 들어가 보고픈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전날 밤 평소 좋아하던 고향 어르신을 만나뵙는 꿈을 꾸었던 터라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폐가가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서 산림청 차원에서 활용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도광 23년’이라고 쓰여진 상량문.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재위 1820~1850)의 연호이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겉보기에 다 쓰러져가는 집 같았지만 막상 들어가보니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정동환씨의 눈에 상량문(새로 짓거나 고친 집의 내력, 공역 일시 등을 적어둔 문서)이 보였다. 또한 뜯겨져 노출된채 바람에 흩날리던 벽지 사이에서 한자로 된 글씨들이 보였다. 얼핏보니 ‘수군(水軍)’자였다. 정동환씨는 곧바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에 신고했다. 고향이 백제 고도인 부여인지라 문화유산에 조예가 남달랐기에 신속한 후속조치를 취한 것이다.

신고를 받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전문가들과 함께 상량문을 읽어보니 ‘도광(道光) 23년 7월 16일’이었다. ‘도광’은 청나라 도광제(道光帝·1820~1850) 연호인데, 도광 23년은 1843년(헌종 9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폐가는 무려 177년 된 집이었던 것이다. 연구소의 추적 조사 결과 이 집은 1970년대 말 주인이 바뀐 후 50년 가까이 방치됐던 것으로 밝혀졌다. 벽지에서 확인된 글씨 역시 심상치 않았다.

폐가의 벽지에서 확인된 한시. ‘새로 잔치를 베풀어 열었다는 소문으로 사방에 선비들이 많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수군(水軍) 김아지, 나이 정해생 15세, 키 4척, 거주지 내맹면, 아버지 윤희’ ‘보인(保人) 박복현, 나이 임오생 18세, 키 4척, 거주지 고산면, 아버지 성산’….

즉 이 명문은 19세기 안흥진성을 지키던 수군의 군적부, 즉 군인 명단이었다. 이 군적부는 안흥진 소속 60여 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적어두었다. 수군의 출신지는 모두 당진현(唐津縣)이었고, 당진 현감 직인과 수결(手決·자필서명)이 확인됐다.

진호신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연구관은 4일 “수군 1인에 보인 1인으로 편성된 체제로 16세기 이후 수군편성 체계를 실질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문서”라고 밝혔다. 명문 중 ‘보인’은 직접 군복무를 하는 사람의 남은 가족을 재정적으로 돕는 비번자를 가리킨다.

177년된 폐가. 1970년대 이후 방치된 것으로 전해진다. 산림청 산림연수원 소속 시설관리인이 발견했다.|정동환씨 제공


문경호 공주대교수(역사교육과)는 “작성 형식이나 시기로 미루어 수군의 징발보다는 군포(軍布·군복무 직접 하지 않은 병역의무자가 대가로 납부하던 삼베나 무명)를 거두어 모으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곳 안흥량(태안 앞바다) 일대의 수군은 고려 후기부터 들끓었던 왜구의 침입을 막고, 유사시에는 한양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군 역할을 했다. 특히 안흥량은 물살이 매우 빨라서 조운선의 난파사고가 잦았던 곳이다. 손태옥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 실무관은 “따라서 이곳 수군은 조선 최악의 험조처(지세가 가파르거나 험하여 막히거나 끊어진 곳)인 안흥량을 통행하는 조운선의 사고방지와 통제를 주요 임무로 삼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폐가에서는 판독이 가능한 한시(漢詩) 3편도 발견됐다.

정동환씨가 발견한 177년된 폐가. 겉은 허물어졌지만 골격은 대부분 남아있었다.|정동환씨 제공

“물품은 진진하여 이같이 많고(物物陳陳如此多) 사방 선비들은 서로 다투어 오네(四方士士爭相來). 요순 세월 같은 앞바다 섬에는(堯舜日月近海島) 전해지는 유풍이 이때까지 성하구나(自來遺風此時盛)”.

“오직 우리는 본시 산 구름 속에 은거하였으니(惟吾本是隱山雲) 벗이 있으나 여러 해 찾아오기는 적었네(有友多年來到少)”.

“이르는 곳마다 이 강산 이 푸른 나무에(到處江山是綠樹)…조각조각 금빛 □ 제일로 빛나고(片〃金□第一光) 소리마다 좋은 속삭임 무한히 좋구나(聲聲好語無限好)”.

군적부는 안흥진 소속 60여 명의 군역 의무자를 전투 군인인 수군(水軍)과 보조적 역할을 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누어 이름, 주소, 출생연도, 나이, 신장을 부친의 이름과 함께 적어두었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이 시는 당시 조선 수군이거나 학식을 갖춘 당대인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수군진촌(水軍鎭村)의 풍경과 일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진도 수군진촌에 자리한 능허대 백운정은 예부터 안흥팔경의 하나인 ‘능허추월(凌虛秋月)’이라 했다. 중국의 능허대와 모습이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중국 사신들이 안흥 앞바다에 체류할 때 이곳을 ‘소능허대’라 칭했다. 또한 전국의 시객들이 몰려들어 시를 짓던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이은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서해문화재과장은 “이번 발견은 전략적인 요충지였던 안흥량 일대에 분포한 수군진 유적과 객관(客館·사신 영접 관청) 유적의 연구와 복원 및 활용에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