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킨 놈' 13년, '저지른 놈' 무죄.. 유례없는 강간 판결

대전=전희진 기자 2020. 6. 4.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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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교사범은 징역 13년, 성폭행 저지른 피고인은 무죄

랜덤채팅 앱에 ‘강간을 당하고싶다’며 다른사람의 접근을 유도, 해당 남성이 성폭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한 남성에게 법원이 중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실제로 성폭행을 한 남성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자신이 저지른 ‘상황극’이 실제 성폭행인지 알고 있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전지방법원 11형사부는(재판장 김용찬 부장판사)는 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위반(주거침입강간)교사 등의 혐의로 기소된 A씨(29)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또 80시간의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와 함께 신상정보공개 5년,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 및 장애인 복지시설에 대한 10년 간의 취업제한을 명했다.

반면 A씨의 지시를 받고 실제로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B씨(39)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A씨는 랜덤채팅 앱에서 만난 B씨가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성폭행하도록 교사한 혐의로, B씨는 직접 원룸에 침입해 성폭행을 저지른 혐의로 각각 기소됐다.

유례를 찾기 힘든 이 범죄는 랜덤채팅 앱을 통해 이뤄졌다.

지난해 8월 랜덤채팅 앱 프로필란에 자신을 35세 여성이라고 거짓 정보를 올린 A씨는 ‘강간을 당하고 싶다. 만나서 상황극을 할 남성을 찾는다’는 내용의 글을 작성했다.

곧 B씨가 그의 글에 관심을 보였다. A씨는 B씨에게 자신의 집 주변 빌라의 주소와 공동현관 비밀번호, 방의 호수까지 알려줘 혼자 사는 여성을 성폭행하게 만들었다.

특히 A씨는 B씨가 피해자의 집에 침입하자 뒤따라가 성폭행을 저지르는 장면을 일부 훔쳐본 것으로 조사됐다.

범행이 이뤄질 당시까지도 이들과 피해자는 서로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였다.

검찰은 지난달 열린 결심공판에서 “익명이라는 탈 뒤에 숨어 혼자 사는 여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범행 수법이 악랄하고 비인간적”이라며 A씨에게 징역 15년, B씨에게는 7년을 구형했다.

기존 성범죄와 달리 랜덤채팅 앱을 이용한 성폭행 교사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A씨측은 B씨가 상황극을 시도하다가 실패할 줄 알았고, 성폭행과 상황극의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B씨측은 A씨에게 완전히 속아 상황극인지 성폭행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는 입장을 폈다.

그러나 재판부는 A씨가 실제로 성폭행이 이뤄지길 바라고 범죄를 저지르게 만든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는 피해자의 빌라 호실과 공동현관 비밀번호, 피해자가 혼자 살고 있는 지 여부까지를 모두 알아내 상황극을 하자고 유인했다”며 “이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A씨는 상황극이 실패하고 B씨가 돌아가길 바란 것이 아니라 성폭행이 실제로 이뤄지도록 만든 점이 인정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는 자신의 주거지에서 예상치 못한 피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지금도 여전히 불안을 느끼고 있다”며 “그럼에도 A씨는 성폭행 피해가 일어나게 하지 않을 의도였다며 자신의 범행을 축소하고 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A씨가 주거지 인근에 주차된 차량으로부터 다른 여성의 전화번호를 확인, 수십 차례에 걸쳐 음란 메시지를 보낸 혐의에 대해서도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다른 차량에 적힌 전화번호에 성적 혐오와 공포심을 일으키는 메시지를 보내며 추가적인 피해자도 발생했다”며 “죄질이 매우 안좋고 피해자들이 모두 처벌을 원하고 있다”고 했다.

B씨의 무죄와 관련해서는 B씨가 자신의 행위가 상황극이 아닌 성폭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볼 만한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B씨의 경우 상황극이 아닌 실제 성폭행인 줄 알고도 범행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면서도 “그러나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성폭행이라는 사실을 알았다거나, 이를 알고도 성폭행을 했다는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여러 사실을 종합할 때 B씨는 합의에 따른 상황극인줄 알고 성관계를 한 것으로 인정된다”며 “다만 무죄가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피해자에게 평생 죄책감을 갖고 살길 바란다”고 판시했다.

대전=전희진 기자 heej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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