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제도적 인종주의'에 흑인들 분노 폭발
[경향신문]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제도적 인종주의’를 지적했다. 법과 제도 속에 은연중에 굳어져 있는 인종주의가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은 물론이고 경제적·사회적 모든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2012년 미국 플로리다주 샌퍼드에서 백인 자경단원 조지 짐머만이 트레이본 마틴이라는 17세 흑인 소년을 사살했다. 하지만 이듬해 짐머만은 무죄평결을 받았다. 배심원단 6명 중 5명이 백인이었다. 거센 비판과 항의시위가 일어났다. 2014년 8월 미주리주 퍼거슨에서는 백인 경찰 대런 윌슨이 18세 흑인 소년 마이클 브라운을 사살했다. 윌슨은 기소되지도 않았다. 그해 12월 경찰에 목이 졸린 흑인 노점상 에릭 가너는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했지만, 경찰은 가혹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가너는 결국 사망했다. 그해 내내 백인 경찰의 흑인 살해가 반복되고 시위가 이어졌다.
똑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다. 지난 5월 25일(현지시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데렉 쇼빈이라는 경찰에게 9분 가까이 목을 짓눌린 끝에 질식사했다. 백인 경관의 가혹행위와 흑인의 사망이라는 사건이 또 반복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는 “미니애폴리스의 폭력사건은 미국 경찰의 인종주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적었다. 쇼빈은 살인죄로 기소됐지만, 사법 절차에 대한 흑인의 불신은 백인 경찰의 폭력만큼이나 뿌리 깊다.
사법 절차에 대한 흑인들의 불신
“숨을 쉴 수 없다”,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는 구호가 미국 전역으로 번졌다. 전국 도시들에서 일어난 시위 가운데 일부는 폭력사태로 비화했으며,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다. 여러 주에 예비군 성격의 주방위군이 투입됐고, 대도시들에 야간 통금령이 내려졌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를 ‘안티파(반파시스트 극좌파)’, ‘테러조직’으로 규정하며 연방군 투입까지 거론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미국의 인종주의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은 “구조적인 문제”, “반흑인 인종주의”라고 했고, 민주당 대선후보인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은 ‘제도적 인종주의’를 지적했다. 법과 제도 속에 은연중에 굳어져 있는 인종주의가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대응은 물론이고 경제적·사회적 모든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기다.
제이콥 프레이 미니애폴리스 시장은 시위가 벌어지자 “이 도시의 너무 많은 분노와 슬픔의 결과”라고 말했다. 미니애폴리스는 진보 성향이 강하고, 백인 사회에서도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이 지역의 역사에는 차별이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플로이드가 사망한 교차로 주변 지역에서 과거 흑인이 집을 사는 것조차 금지돼 있었다며 “불평등에 대한 흑인 공동체의 분노를 반영한 시위”라고 전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플로이드의 사망은 치안의 실패뿐 아니라 주택 소유를 비롯한 경제정책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가구 중위소득은 3만8200달러로 백인가구 8만5000달러의 절반도 안 된다. 미네소타주의 흑인 인구는 약 3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6%이고, 미니애폴리스에서는 18.6%를 차지한다. 그런데 미네소타주 코로나19 확진자 5000명의 데이터에서 흑인 비율이 29%였다. 미국 전역으로 넓혀봐도 코로나19의 ‘인종 격차’가 확인된다. <법률·생물학 저널>에 최근 실린 논문에 따르면 시카고에서는 흑인 비율이 29%로 나타났으나 코로나19에 따른 흑인 사망자는 70%가 넘는다. 미시간주 한 카운티에서는 전체 인구 중 흑인 비율이 12%였으나 코로나19 감염자 중 흑인 비율은 46%에 달했다.
사법제도는 특히 미국에서 인종차별이 심한 영역이다.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시작한 ‘마약과의 전쟁’이 단적인 예다. 값이 비싸 백인이 많이 쓰는 코카인 분말은 500g 넘게 소지해야 처벌을 받았지만, 흑인이 주로 이용하는 값싼 마약 ‘크랙’은 5g만 갖고 있어도 5년형을 선고하는 식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 뒤인 2010년 공정형량법이 만들어지면서 그나마 차별이 완화됐지만, 겉으로는 인종을 명시하지 않아도 실제론 인종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 제도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이자 개인 변호사인 루돌프 줄리아니가 뉴욕시장으로 있던 시절, 뉴욕시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였다. 경찰 불심검문이 늘어나고 치안이 강화됐다. 그러나 불심검문의 대상은 흑인일 때가 훨씬 많고, 실제 경찰에 의한 흑인사망 중 상당수가 불심검문 과정에서 일어났다. 이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형사·사법개혁, 한국식으로 말하면 경찰·검찰 개혁 요구가 끊임없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코로나19 봉쇄를 어겨 뉴욕 브루클린에서 체포된 40명 중 35명이 흑인이었다. 흑인 저소득층은 ‘거리 두기’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지적이 나왔다.
주택대출에도 인종적 장벽
주택대출에도 ‘신용도’라는 이름의 인종적 장벽이 세워져 있다. 대출업체들은 저소득층과 소수인종 거주지역에 상대적으로 고금리를 적용한다. 뉴욕의 흑인 중 자기 집이 있는 사람은 3분의 1이 안 된다. 백인의 주택소유율은 그 두 배다. 흑인의 32%만이 집을 갖고 있는데, 이는 백인의 절반도 안 되는 수치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대를 향해 “쓰레기들”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으며 폭력을 오히려 부추기고 있다. 지난 1월 <워싱턴포스트>-입소스의 흑인 대상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10명 중 8명은 트럼프 대통령이 ‘인종주의자’라고 답했다. 트럼프 집권 이후 흑인이 느끼는 차별은 더욱 커진 것으로 보인다. 응답자의 65%는 지금이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가기에 ‘나쁜 시기’라고 답했다. 비슷한 시기 갤럽조사에서는 몇 년 새 백인과 비백인의 행복도 격차가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백인 90%는 현재의 행복도에 만족을 표시했으나 비백인의 경우 수치가 77%로 줄었다. 오바마 정부 때보다 11%나 낮아진 것이었다. 백인의 75%는 자녀가 미국 사회에서 편안한 삶을 누릴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흑인 중 같은 응답을 한 사람은 16%뿐이었다.
구정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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