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김여정 통하라' 대남 메시지..실질적 2인자 힘 실어줘

이제훈 2020. 6. 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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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분석 l 전면에 나선 김여정
통전부 "대남사업 총괄" 공식화
노동신문, 대대적 담화 보도 이어
후속조처 지시·각계 반향 '도배'
"북한 권력 구조상 김정은만 가능"
"김여정 담화·대북전단 대응따라
남북관계 '위기-기회' 갈림길"
2018년 2월10일 평창겨울올림픽 남북 고위급 만찬에 참석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 사진공동취재단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4일 담화를 기폭제 삼아 북한 당국의 일부 북한이탈주민 단체의 대북전단 뿌리기에 대한 비난과 남쪽 당국을 향한 ‘차단 압박’이 연일 불을 뿜고 있다. ‘김여정 담화’(4일)→통일전선부(통전부) 대변인 담화(5일)→항의군중집회를 포함한 “각계 반향” 보도(<노동신문> 6·7일치)의 순으로 나흘째 이어지고 있다.

지금껏 북쪽에서 금기어나 다름없던 ‘탈북자·대북전단’ 문제를 ‘김여정 담화’를 계기로 “전체 조선인민을 모독·농락한 특대범죄행위”라 규정하고, 오히려 ‘모든 인민의 의제’로 만들어 경각심을 촉구하는 모양새다. ‘김여정 담화’를 ‘김정은 국무위원장 담화’ 수준으로 대하는 이런 모습은, 김여정 제1부부장이 이미 ‘특별한 지위’에 올랐음을 드러내는 강력한 지표로 볼 수 있다.

 세 가지 사실이 특히 중요하다. 첫째, 김여정 제1부부장이 “대남사업을 총괄”한다고 통전부 담화로 이례적으로 공식화한 점이다. 둘째, 김 제1부부장이 후속 조처를 “지시”했다는 통전부 담화의 언급이다. 셋째, <노동신문> 6·7일치를 1면부터 ‘도배’하다시피 한 “각계 반향”이다. 남북관계의 진로, 북한 내부 권력 구조와 관련해 함의가 풍부하다.

먼저 남북관계. 통전부 담화는 ‘김여정 담화’를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제1부부장이 경고한 담화”라 규정했다. 이어 김 제1부부장이 “5일 대남사업 부분에서 담화문에서 지적한 내용들을 실무적으로 집행하기 위한 검토사업에 착수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개성 북남공동연락사무소부터 결단코 철폐할 것”이라는 주장은 이 ‘지시’에 따른 조처다. ‘조국통일’을 국시로 한 북한에서 대남사업의 최고 책임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며, 실무 책임자는 통일전선부장이다. 그런데 통전부 담화는 김 제1부부장이 “대남사업을 총괄”한다고 굳이 강조했다. 남북관계에 관한 한 김 제1부부장이 김정은 위원장의 ‘대리인’이자 대표 창구이니, 남북관계를 풀려면 ‘김여정을 통하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노동신문>이 김 제1부부장의 “지시”를 언급한 통전부 담화를 6일치 2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고 ‘김여정 담화’의 “각계 반향”을 6·7일치에 펼쳐 보도한 사실은, 북한 권력구조와 관련해 섬세한 독해가 필요하다. <노동신문>은 6일치 기사(47꼭지) 가운데 ‘김여정 담화’ 관련 기사를 1·2면에 7꼭지 실었다. 7일치엔 전체 30꼭지 가운데 1·3·6면에 12꼭지를 관련 기사로 채웠다. 김일성김정일사회주의청년동맹이 주도한 청년학생들의 집회(6일 평양시청년공원야외극장)를 포함한 김책공업대학·평양종합병원건설장·김종태전기기관차연합기업소 등의 ‘항의군중집회’가 사진과 함께 소개됐다. 평양시당위원장·국가계획위원장·중앙검찰소장·삼지연시당위원장·여맹중앙위원장·황해남도농촌경리위원장 등의 기고문이 <노동신문>에 실렸다.

 이는 북한 최고 권위지이자 ‘인민 필독 매체’인 조선노동당 중앙위 기관지 <노동신문>에 ‘지시’가 실리고 “각계 반향”이 소개되는 인물은 수령(최고지도자)뿐이던 북한 역사에 비춰 전례없는 현상이다. 공식 권력구조상 ‘서열 2위’로 불리는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겸 국무위원회 제1부위원장한테도 이런 대접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북한 읽기에 밝은 전직 고위관계자는 “북한에선 수령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지시했다는 내용이 노동신문에 실릴 수가 없다”며 “김여정이 이미 내부적으로 ‘(잠재적) 후계자’에 올랐음을 보여주는 틀림없는 징표”라고 짚었다.

 “적은 역시 적”이라며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 우리의 결심”이라는 통전부 담화는, 김여정 제1부부장이 김정은 위원장을 대신해 ‘대남사업 총괄 책임자’로 전면에 나선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 정부가 이번 대북전단 사태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앞으로 남북관계의 향방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직 고위관계자는 “북쪽은 남북 정상이 이미 합의했고 제재와도 무관한 대북전단 금지 약속조차 지키지 못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함께 할 수 있겠느냐고 남쪽에 묻는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대북전단이 또 뿌려진다면 남북관계의 문이 완전히 닫힐 수 있는 위험한 국면”이라며 “정부가 이 문제를 남북합의에 따라 원칙적으로 잘 풀어간다면 김여정이 전면에 나선 만큼 오히려 남북관계에 중대한 기회의 창이 열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북전단 문제로 ‘전면에 나선 김여정’이라는 새롭고 낯선 현상은, 위기와 기회의 두 얼굴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7일 통일부가 통전부의 거친 담화에 맞대응을 피하고 “판문점 선언을 비롯한 남북 정상이 합의한 사항을 준수하고 이행해나간다는 게 정부 입장”이라는 짧고 건조한 공식 견해를 밝힌 데에는 이런 상황의 민감성에 대한 고려가 깔려 있다. 아울러 이는 ‘김여정 담화’ 당일 통일부가 ‘입법을 통한 대북전단 차단’ 방침을 밝히고, 청와대가 “대북전단은 백해무익한 것”이라는 분명한 태도를 밝힌 연장선에 있다.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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